오르다 보면 작은 멧새 무리 언덕을 넘나든다 그 바람에 들찔레 흔들리고 개미떼의 나들이도 보인다
그림자 없이 내려오는 숲속 순한 짐승들 어깨 비비는 소리 가득하여
사람에 무너지는 날에도 사람은 그립고 사람에 다치는 날에도 사람은 위안이다 - [유심](2011년 11~12월 호)
#. 박재화 시인(1951년생) : 충북 옥천 출신으로 1984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 시를 쓸 때 [우리말본]을 옆에 끼고 쓰며, 남에게 듣거나 책에서 얻은 지식으론 만족 못해 꼭 경험을 한 뒤 그 깨달음을 시로 남긴다고 함.
<함께 나누기>
한 서당에서 스승이 묻고 제자들이 답합니다.
스승 : 캄캄하여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길 갈 때 짐승들의 으르릉대는 소리도 들려온다. 아직 갈 길은 남았고 잠시 피할 곳도 없다. 자 그럴 때 만나면 가장 겁나는 동물은 뭘까?
제자 1 : 호랑이입니다. 제자 2 : 늑대입니다. 제자 3 : 멧돼지입니다.
제자들이 각자 무서운 동물을 거론했지만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자 제자들이 궁금해 물었다. 그럼 밤길에 무슨 동물을 만나면 가장 무섭느냐고?
스승 : 바로 너희 같은 사람이니라.
제자들은 처음에 말도 안 된다고 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가만 생각해 보니, 어쩌면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여겨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스승은 이어서 다시 묻습니다.
스승 : 그렇게 밤길을 가다가 발을 잘못 놀려 미끄러져 옴쭉달싹 못할 만큼 크게 다치게 되었다. 자 이럴 때 가장 도움 되는 동물은 뭘까? 제자 1 : 개입니다. 제자 2 : 염소입니다. 제자 3 : 닭? 토끼? 글쎄요...
제자들이 여러 동물을 거론했지만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자 제자들이 궁금하여 물었다. 다쳐 옴쭉달싹 못할 때 어떤 동물이 가장 도움되느냐고?
스승 : 바로 너희와 같은 사람이다. 아무리 말 잘 듣는 개라도 사람을 업고 내려갈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
시로 들어갑니다.
“살다 보면 / 사람에 무너지는 날 있다 / 사람에 다치는 날 있다”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사람 사이에 정은 점점 더 팍팍해져 서로에게 상처 주는 일이 많아집니다. 의도하지 않았건만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가 칼날 되어 상대의 가슴을 찌르기도 합니다. 순간 아뿔싸 하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 그렇게 마음을 베인 날엔 그 아픔을 가라앉히려 여러 방법을 모색하는데 혼자서 산에 오르는 일도 그 가운데 하나겠지요. 오르다 보면 작은 멧새 무리들이 숲속을 드나들며 부르는 노래 들으며, 들찔레꽃도 활짝 웃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니까요.
“그림자 없이 내려오는 숲속 / 순한 짐승들 / 어깨 비비는 소리 가득하여”
숲을 거닐다 보면 나를 괴롭히던 사람은 없는 대신, 어느 누구도 해치지 않고 한가하게 뛰노는 무수한 빛깔과 소리들. 특히 저희들끼리 만들어내는 자연의 평화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 속에 묻히고 싶을 정도로.
“사람에 무너지는 날에도 / 사람은 그립고 / 사람에 다치는 날에도 / 사람은 위안이다”
‘사람에게 무너져도 사람이 그립고, 사람에게 다쳐도 사람은 위안을 준다.’라는 이 시구에 동의할 사람은 얼마나 될지. 아마 교과서에서 배운다면 선생님은 이리 가르치겠지요. ‘그래도 사람만이 위안이다.’라고. 저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럼 현실은? 이에 부정적인 답이 더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사회란 틀 속에 살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많은 상처를 받지만 희망도 얻습니다. 지금 몹시 힘든 때입니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사람의 잘못으로 사람이 당한 깊은 상처, 그 상처를 덮어줄 사람도 바로 우리 모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