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그때는 (부산) 서면에서 동래까지 전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 그러니까 전차 없어지기 전의 일이다. 등교할 때는 어떻게 해서든 빨리 가야 해서 내가 살던 연지동에선 전차노선이 없어 서면이나 양정까지 뛰어가야 했다. 대신에 하교할 때는 여유가 있어 걸어가다가 타거나 아예 걸어오기도 했다. 특히 토요일엔 만덕고개를 넘어가기까지 했다. 지금 같으면 세 시간쯤 걸리는 거리를 걸어갈 중학생이 있으랴. 그때는 그것마저 즐거운 놀이였으니..
그러다 어느 날 방향을 달리했다. 학교인 동래에서 부산교대 앞을 거쳐 양정까지 걸어서 집으로 가보기로. 교대 앞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아주 구수한 내음이 흘러나왔다. 재빨리 둘러보니 ‘대선소주’라는 술공장뿐.
(오래전 '대선주조' - 구글 이미지에서)
술공장에서 냄새가 난다면 당연히 알코올 냄새여야지 어떻게 구수하단 말인가. 어렸지만 그 정도는 알 나이. 한창 호기심 많을 때 아닌가. 술공장 가까이 가니 다가갈수록 더욱 구수한 내음이 났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걷다 드디어 구수함의 정체랑 마주쳤다. 세상에! 하얀 뭔가가 잔뜩 쌓여 산을 이루었다. 비 맞지 않도록 해두었으나 지금과 달리 내용물이 다 보였다. 궁금함에 일하는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왜 소주 한 잔 마시고 싶어?” “아 아니요, 저기서 구수한 냄새가 하도 나서...” “아... 빼때기 보고 말하는 거구나.”
그때 처음 ‘빼때기’란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뒤 (안태) 고향인 하동에 갔다가 지붕 가득 말리고 있는 빼때기를 보았다. 이젠 빼때기란 낱말을 대부분 다 알리라. 고구마 썰어 말린 군것질감을 가리키는데, 특히 통영에 가면 ‘빼때기죽’이 유명하니 방문했다면 맛도 봤을 터.
자 그럼, 대선소주 공장에 빼때기를 잔뜩 쌓아 놓은 까닭은? 바로 소주의 주정(酒精 : 에틸알코올)이 고구마 빼때기이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소주는 ‘희석식’이다. 조금 어렵지만 쉽게 말하면 95% 이상의 고순도 에틸알코올에 물을 타(희석하여) 만든 술이 소주다. 이때 품질 좋은 에틸알코올을 얻으려면 고구마 (빼때기) 같은 식물성 탄수화물을 발효시킨 후 연속 증류하여야 한다. 소주공장 곁을 지나가면 주정을 만들기 위해 빼때기를 군데군데 잔뜩 쌓아놓았으니 구수한 내음이 흘러나오는 까닭이 바로 거기 있다.
- 참고로 에틸알코올은 희석해 마셔도 되지만 메틸알코올(내연기관 연료나 플라스틱 생산재료용 알코올)은 절대 안 된다. 먹는 순간 하늘로 직행하거나 눈이 멀게 된다 -
이렇게 길게 빼때기 거론한 까닭을 눈치챘으리라. 올가을에도 수확한 고구마를 썰어 말렸기 때문이다. 다른 해보다 양이 적어 조금밖에 못했지만 추억의 맛을 살리기 위해 널어 말린다. 또 그래야 글감도 얻고. 바짝 마른 빼때기는 바로 먹어도 되지만 이(빨)가 깨질 정도로 단단해 부러져도 좋다는(?) 각오로 먹는다면 몰라도. 양이 제법 되면 팥을 조금 넣고 끓이면 맛있는 ‘빼때기죽’이 되고, 만약 이가 좋으면 입안에 넣어 오래 씹으면 단맛과 고소함이 어우러진다.
아내는 고구마를 무척 좋아한다. 내가 아침엔 떡국, 점심엔 김밥을 일 년 내내 먹어도 물리지 않듯이 아내 역시 고구마와 옥수수면 버틴다고 장담한다. 보통 고구마와 옥수수는 주식 아닌 간식거리로 쓰지만 아내에겐 아니다. 맛도 있고 변비에도 효험을 본다 하니.
(우리 집에서 빼때기 말리는 장면)
그래서 아무리 작은 고구마라도 버리지 않는다. 게다가 고구마는 겨울에 찾아오는 손님 대접할 때 그저 그만 아닌가. 손님뿐 아니라 당장 군것질거리로 고구마보다 더 좋은 게 있으랴. 삶아 먹고, 구워 먹고, 밥에 넣어 고구마밥 해 먹고….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삶아온 고구마 껍질을 벗겨가며 먹는 맛. 아궁이에 불 지피면서 짬짬이 뒤집어가며 구운 고구마를 먹는 맛. 밥 속에 잘 익은 누런 고구마를 향해 전진 후퇴를 거듭하는 숟가락. 썰어 튀긴 고구마에 물엿을 졸여 만든 맛탕 향한 삼지창.
아내가 고구마 자체를 좋아한다면 나는 빼때기나 쫄때기를 더 좋아한다. (고구마 날 것을 말리면 빼때기, 삶아 말리면 쫄때기) '빼때기'란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그게 우리말이 아니라 일본말이나 중국말인가 하고 갸우뚱하는데 경상도 말(사투리가 아닌)이다.
(곱게 마른 빼때기 - 구글 이미지에서)
아니 제주도에 가서도 들었으니 순수 경상도 말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있으나, 그래도 '빼때기죽' 유명한 곳 하면 경남 통영 아닌가. 이전에 한 번이라도 먹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사진을 보자마자 '아 그거…' 하며 고개를 끄덕이리라. 이 빼때기는 삼사십 년 전만 해도 섬 지역이나 서부 경남에서는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주요 군것질감이면서 죽으로 만들어 먹을 땐 한 끼 식사. 이제 가만 생각해 보니 빼때기를 많이 먹었던 곳은 고구마 외에 다른 작물을 심기 힘든 섬이나 유독 고구마가 잘 자라는 지역이다.
거기 사람들에게 쌀 대신 고구마가 주식이었으니 보관할 방법을 찾느라 무진 애를 썼으리라. 자칫하면 썩거나, 곰팡이가 피거나, 쥐의 입속으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래서 낸 꾀가 고구마를 썰어 말린 상태로 보관하는 방법이었으리라. 이렇게 만든 빼때기는 겨울 넘기는 훌륭한 양식이 되었고, 그 추억을 잊지 못하는 이들에겐 고향으로 달려가게 만든다.
(우리 집에서 쫄때기 말리는 과정)
현재는 호박고구마ㆍ 밤고구마ㆍ 꿀고구마ㆍ 황토고구마 등 다양하게 이름 붙이지만 나 어릴 때는 '타박고구마'와 '물고구마'뿐이었다. 그중에 타박고구마를 말리면 빼때기가 되지만, 물고구마를 바로 말리면 그 풍부한 물기 때문에 쪼그라들어 볼썽사납게 된다. 고향 어른들은 그걸 극복하려고 꾀를 내 물고구마는 썰어 말리지 않고 삶아 말렸다. 이땐 완전히 말려선 안 되며, 수분이 조금 남은 까들까들한 상태여야 한다. 이렇게 물고구마를 삶아 뭉텅뭉텅 썰어 말린 걸 '쫄때기'라 한다. 그러니 생고구마는 '빼때기', 삶은 고구마는 '쫄때기' ('고구마 피데기'라고도 함)
이 쫄때기의 맛은 빼때기와 다르다. 빼때기의 매력이 구수함에 있다면, 쫄때기는 달큼함에 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빼때기는 알아도 쫄때기는 모르는 이가 많다. 아니 사실 쫄때기란 말을 아는 이는 많다. 그러나 이때의 쫄때기는 '쫄따구'의 변형으로 군대에서 '졸병'을 가리키는 은어로 알고 있거나, 옛날 문방구점에서 아이들에게 불티나게 팔리던 불량과자인 '쫀득이'의 딴말로 알고 있을 뿐.
(빼때기죽 - 구글 이미지에서)
빼때기와 쫄때기가 아무리 맛있다고 해도 지금 사람들의 입맛을 모두 잡아당기진 못한다. 특히 애들 입엔... 하지만 거기에는 입으로 느끼는 맛 말고, 정의 맛과 추억의 맛과 고향의 햇살이 잘 배어든 맛이 담겨 입맛을 다신다. 저번 날 혼자 씻어 칼로 자르고, 삶고, 말리며 싱글벙글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내는 '또 병 도졌네!' 하는 눈길을 보냈다. 그래도 어떤가. 시골살이는 창조적이어야 맛이 나지 않는가. 이렇게 하나씩 살리다 보면 그리운 사람 떠올리는 짬도 가지고.
*. ‘빼때기’와 ‘쫄때기’는 국어사전에 실린 말이 아니지만 사투리도 아닙니다. 나중에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게 되면 언젠가 실리게 되겠지요. 그리고 인터넷 뒤지면 ‘빼떼기’ ‘쫄떼기’로도 나옵니다. 아직 정착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퍼뜩 사전에 등재되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