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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Dec 19. 2024

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40)

제240편 : 신기섭 시인의 '뒤늦은 대꾸'


@. 오늘은 신기섭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뒤늦은 대꾸
                            신기섭

  빈 방, 탄불 꺼진 오스스 추운 방,
  나는 여태 안산으로 돌아갈 생각도 않고,
  며칠 전 당신이 눈을 감은 아랫목에,
  질 나쁜 산소호흡기처럼 엎드려 있어요
  내내 함께 있어 준 후배는 아침에 서울로 갔어요
  당신이 없으니 이제 천장에 닿을 듯한 그 따뜻한
  밥 구경도 다 했다, 아쉬워하며 떠난 후배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주먹질 같은 눈을 맞았어요
  불현듯 오래전 당신이 하신 말씀; 기습아,
  인제 내 없이도 니 혼자서 산다, 그 말씀,
  생각이 나, 그때는 할 수 없었던,
  너무도 뒤늦게 새삼스레 이제야
  큰 소리로 해보는 대꾸; 그럼요,
  할머니 나 혼자도 살 수 있어요,
  살 수 있는데, 저 문틈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눈치 없는
  눈발
  몇
  몇,
  - [분홍빛 흐느낌](2006년)

  #. 신기섭 시인(1979년 ~ 2005년) : 경북 문경 출신으로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등단하던 그 해 영천 출장 가는 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이듬해 2006년에 유고시집 [분홍색 흐느낌]이 나옴.
  (참고로 동명이인으로 울산 언양읍 출신의 신기섭 시인도 있음)




  <함께 나누기>

  시 해설에 앞서 시인 소개부터 합니다. 시를 이해하는 지름길로 여겨.

  키츠(25), 랭보(26), 셀리(30), 이상(27), 윤동주(28), 기형도(29), 박인환(30) 이 시인들의 공통점은? 이미 이름 뒤에 붙은 숫자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요절 시인들입니다. 아주 짧은 일생을 시에 살다가 시처럼 가버린 시인들.
  신기섭 시인은 만 26세의 나이로 하늘로 갔습니다. 그것도 등단한 지 일 년도 채 지나기 전 그해 겨울에. 시집도 펴내기 전이라 친우들이 문예지에 발표한 시와 미발표 원고를 모아 유고시집을 만들었는데, 오늘 시도 그 가운데 한 편입니다.

  시인은 어릴 때 엄마와 아빠가 헤어져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에 컸는데, 특히 할머니는 엄마 역할을 했답니다. 그래선지 시 가운데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글감이 많습니다. 오늘 시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시인들처럼 지독한 가난을 겪으며 봉천동 언덕배기 옥탑방에서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시인. 얼마나 돈이 없었든지 [한국일보] 신춘문예 담당자가 당선 사실을 알렸을 때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상금을 앞당겨서 지급받을 수 없겠느냐고... 주인이 이사를 하라고 하는데... 옮길 전세금이 없어서...'

  시로 들어갑니다.

  살아계실 때 할머니에게 바로 대답해야 했던 대꾸를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야 답합니다. 제목이 ‘뒤늦은 대꾸’가 된 배경입니다.

  “불현듯 오래전 당신이 하신 말씀 : 기습아, / 이제 내 없이도 너 혼자서 산다. 그 말씀”

  할머니는 당신이 떠나고 나면 혼자 남을 어린 손자가 걱정되었겠지요. 그러니 내 없어도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셨을 테고. 아마도 어릴 때 들려주었을 말씀 같은데 그때는 철이 안 들어 답을 못했고, 나이 들어 할머니가 먼 길 떠나고 나니 새삼 생각이 납니다.

  “너무도 뒤늦게 새삼스레 이제야 / 큰소리로 해보는 대꾸 : 그럼요 / 할머니, 나 혼자서도 살 수 있어요”

  혼자서도 살 수 있다는 용기 담은 발언.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했으면 더 편히 눈감았을 텐데. 허나 이제는 듣는 이 없어 허공으로 사라져 갈 뿐. 혼자서 살 수 있는데, 저 문틈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눈발이 눈치 없이 날립니다. 할머니 안 계시니 숭숭 뚫린 가슴으로 그 눈발은 파고 또 파고들고...

  오늘 이 시 읽는 글벗님들 가슴으로 숭숭 스며드는 '눈치 없는 눈발 몇 몇'이 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정말 눈발 날리는 곳도 있을 거구요. 허허로운 우리네 가슴에 눈발이 날립니다. 요절한 시인의 시구가 우리네 심장을 살며시 두드리는 듯...

  단순히 내용만 좋은 시가 아닙니다. 표현 면에서도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간직하고픈 묘사와 비유가 얼마나 많은지.
  ‘오스스 추운 방’, ‘으스스’는 잘 쓰는데 ‘오스스’는 낯설지요. '으스스'보다 조금 약한 말이라 보면 됩니다.
  “당신이 눈을 감은 아랫목에 / 질 나쁜 산소호흡기처럼 엎드려 있어요”
  “당신이 없으니 이제 천장에 닿을 듯한 그 따뜻한 / 밥 구경”
  “주먹질 같은 눈을 맞았어요”

  이 시에서 최고의 절창(絶唱)은,

  “저 문틈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눈치 없는
  눈발
  몇
  몇,”

  이 부분을 “저 문틈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눈치 없는 눈발 몇몇,”처럼 한 줄로 했을 때와 비교해 보세요. 눈발이 화자의 마음을 몰라주고 뚫린 문틈 사이사이로 눈치 없이 들어오는 모습이 마치 눈에 보이듯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시인이 교통사고로 하늘로 갔을 때 기사를 간추려 정리해 봅니다.

  "어느 눈 오는 날 새벽부터 출장을 가라는 성화에 찝찝한 기분으로 고속버스 탔다. 한 번 쉬는 휴게소에 내리지 않고 버텼으나 차는 전복되고 말았다.
  같이 탄 승객 중 가벼운 찰과상 입은 승객 한 명뿐인 줄 알았는데 다른 한 사람이 크게 다쳤고... '피곤하다'는 한마디 말만 남긴 채 죽었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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