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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번째 행인 Mar 15. 2021

일본의 봄과 벚꽃, 그리고 야스쿠니

벚꽃 필 무렵, 사람들은 왜 야스쿠니에 주목할까

지난 ‘일본에서 겨울을 날 때 필요한 것’ 편에서 언급했지만, 일본의 겨울은 정말 춥고 또 춥다. 기온이 아닌, 이 나라 특유의 난방 시스템과 지리적 특성 탓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이 더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봄의 전령 ‘벚꽃’이다.



2월에는 편의점이나 카페, 음식점 등이 기간 한정 계절상품인 ‘사쿠라 에디션’을 속속 선보이고, 주요 건물에는 벚꽃 장식이 등장한다.


한창때엔 벚꽃구경 명소인 도쿄 메구로 강 주변과 신주쿠 교엔, 우에노 공원 등지엔 행락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고, 일부 명소에서는 코타츠를 갖고 나와 따뜻하게 벚꽃 나무 아래 앉아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게 코로나 19 상황에선 ‘아 옛날이여’지만 말이다.


2월이 되면 편의점과 식품 회사들이 잇따라 계절한정 사쿠라 에디션을 내놓는다./사진=세븐일레븐, 로손, 모리가나 홈페이지


3월에 접어들면 기상청을 통해 전국의 벚꽃 개화 시점이 정기적으로 발표된다. 길고 춥고, 또 어두웠던(일본은 겨울에 정말 해가 짧다) 시간을 지나 맞이하는 봄 소식이기에 벚꽃에 대한 일본인들의 애정은 남다르다. 그래서 자매들의 이번 수다 주제는 벚꽃 시즌이다. 즐거운 하나미(花見·꽃놀이) 이야기에 앞서 ‘벚꽃’ 하면 한 번은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들을 정리해 보려 한다.


* 참고로 이 글에서는 ‘벚꽃’과 ‘사쿠라’라는 단어를 상황에 따라 함께 표기하도록 하겠다.





사쿠라와 야스쿠니


일본 다수 국민에게 벚꽃은 앞서 말한 ‘긴 겨울을 나고 맞이하는 봄’의 의미가 크다. 그러나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 사쿠라는 일본의 국화요, 봉건 시대 사무라이 정신을 담은 꽃이며, 근대 역사에서는 일본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공포와 잔혹함의 또 다른 표상이었다. “천황 폐하를 위해 사쿠라 꽃잎처럼 아름답게 지라”는 서슬 퍼런 주문은 전쟁의 가장 무서운 ‘인간 병기’를 만들어냈고, 곳곳에서 핏빛 꽃잎이 휘날렸다. 국내 벚꽃 시즌에 ‘왜색 짙은 문화가 불편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역사적 이유에서다.


지난 3월 14일 야스쿠니 신사 벚꽃 표준목에 꽃 5송이가 피자 기상청이 도쿄의 벚꽃 개화를 선언했다./사진=ANN 뉴스 캡쳐


공교롭게도 일본의 벚꽃 개화 시기 사람들이 주목하는 곳이 바로 군국주의의 또 다른 상징 야스쿠니 신사(靖国神社)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이 일으킨 크고 작은 전쟁에서 숨진 사람들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는 시설로,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246만 6,000여 명이 합사 돼 있다.)


야스쿠니 신사


기상청은 1966년부터 야스쿠니 경내의 표본 벚꽃 나무를 관찰해 5송이 이상 꽃을 발견하면 도쿄의 본격 개화를 선언한다. 올해 개화 선언은 지난 14일 일요일 이뤄졌다. 관측 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개화 선언이 이뤄지면서 이날 야스쿠니 신사에는 이를 구경하려는 방문객과 미디어가 몰려들었다. 왜 야스쿠니의 벚꽃 나무가 표준목인가. 표준목은 기상대에서 가깝고 오랜 세월 관측 환경이 변하지 않는 곳에 있는 나무여야 하는데, 야스쿠니 신사가 이 조건을 모두 충족했다고 한다. 기상청은 치요다구 오오테마치에 있어 야스쿠니 신사와 매우 가깝다. 야스쿠니 이전엔 표준목이 기상청 부지 내에 있었다고 한다.


자매2가 2020년 3월 중순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을 때 경내 모습


야스쿠니 신사와 사쿠라의 역사적 의미는 사실 일본인들의 ‘꽃놀이’ 문화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이들에게 봄날의 하나미는 가을의 단풍 구경과 다를 바 없는 ‘이 계절에만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야스쿠니 신사 역시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있는 곳’이라는 인식보다는 규모 큰 신사, 벚꽃놀이로 유명한 곳 정도로 아는 이도 많다. ‘논란이 있는 곳이지만, 나는 관심 없다’는 이들도 물론 있다.


야스쿠니 신사 경내에 있는 '이달의 유서' 게시판(왼쪽)과 침략 전쟁을 미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유슈칸' 박물관. 자매2가 방문했을 때 유슈콴은 코로나 19로 휴관중이었다.


자매2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바로 전날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다. 사실 맘먹지 않는 한 앞으로 일본 여행에서 이곳을 찾는 일은 없을 것 같았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도 싶었다. 그러나 코로나 때문에 경내의 주요 시설은 문을 닫아 자세히 둘러볼 수는 없었다. 3월 중순 찾아간 신사 경내에는 기모노를 입고 이제 막 움튼 벚꽃 나무 아래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들이 봄날을 만끽하는 경내 한쪽엔 태평양 전쟁에 나갔다가 숨진 이들의 마지막 글을 소개하는 ‘이달의 유서’ 게시판과 일본의 침략 전쟁을 미화한 전쟁 박물관 ‘유슈칸’이 자리하고 있다.



벚꽃 스캔들, 사쿠라를 보는 모임


일본 벚꽃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또 있다. 바로 2019년 논란이 된 ‘사쿠라를 보는 모임’이다. 1952년부터 시작된 ‘사쿠라를 보는 모임’은 매년 4월 도쿄 도심 공원인 신주쿠 교엔에서 총리 주최로 열리는 정부 봄맞이 행사로 각계 유명 인사와 당 지도부, 연예인 등을 초청한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이 행사를 총리 재직 시절 개인 후원회 친목 행사로 사물화(私物化)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2018년 아베 총리의 지역구 주민들이 대거 참가한 가운데 도쿄의 최고급 호텔인 ‘뉴오타니’에서 열린 전야 행사 때는 일부 참가비를 아베 총리 측이 지원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향응 제공 논란을 일으켰다.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하던 아베 전 총리는 결국 지난해 12월 기자회견을 열어 “관련 회계 처리가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진행됐다”며 “그러나 책임을 느끼고 깊이 반성한다”라고 사과했다.


한 옷가게에서 판매된 '벚꽃 스캔들' 풍자 티셔츠


누군가에 의해 벚꽃은 군사화되기도, 또 정치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연을 벗 삼은 이 나라 국민들의 소박한 연례 계절 행사는 그 자체로 오랜 시간 그들 삶에 자리해 온 일상이었다. 정 반대의 시선과 평가 속에 올해도 봄은 왔고, 벚꽃은 폈다. 코로나 19라 해도 꽃을 보려는 사람들은 메구로 강과 신주쿠 교엔, 곳곳의 명소로 몰려들 테다.


다음 화에서 다룰 이야기도 벚꽃 놀이다. 군국주의 미화와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이 아닌, 국민들의 소박한 계절 행사로서의 그 벚꽃 놀이다.




이 연재는 두번째 행인엄격한 여행자가 함께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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