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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번째 행인 Mar 18. 2021

일본의 지진과 비상식품

지진과 태풍에 대비하다

[자매2의 혼잣말]


'미나토 자매의 일본 이야기' 매거진은 작가 '두번째 행인'과 '엄격한 여행자' 두 명이 함께 만들고 있다. 특정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두 편의 글(각각 한 편씩)로 정리하는 방식이다. 되도록 자주 만나 이야기하고, 이를 바로 글로 옮기고 싶지만, 각자의 직장 생활과 일정이 있다 보니 연재 주기를 짧게 가져가며 많은 글을 공유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이에 일본 소식이나 정보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틈틈이 [혼잣말]로 메모처럼 정리해보려 한다. [혼잣말]이라는 부제목만 붙였을 뿐 기존의 연재와는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두 사람의 '수다' 못지않게 재밌는 '혼잣말'도 앞으로 많이 사랑해주시길.

 





지진, 그 울렁거리는 첫 만남


지난 2월 일본 후쿠시마현 앞바다에서 규모 7.3의 강진이 발생했다. 동일본 대지진 10주기(2011년 3월 11일 14시 46분 일본 동북 지방에서 발생한 일본 관측 사상 최대인 리히터 규모 9.0의 지진)를 한 달여 앞두고 발생한 강진에 열도는 또 한 번 장감에 휩싸였다.


도쿄에 살면서 경험한 지진 강도 중 가장 센 게 4였는데, 4만 해도 흔들림이 꽤 강했다. 내가 일본에서 처음 지진을 겪은 건 롯폰기 스타벅스 야외 자리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그러고 보니 이때 자매1이 함께 있었다.) 코끼리 돌기를 열심히 한 뒤 멈춰 섰을 때의 울림 같은 게 느껴졌는데, 그게 지진이었다. 그 이후 일상에서 심심치 않게 땅의 흔들림을 경험하다 보니 '아 또 왔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이를 넘기는 일이 많았다. 참고로 일본은 '어, 뭐지?' 하는 순간 휴대폰에 지진 알림이 뜨고, 야후 재팬에 들어가면 각 지역별 강도, 쓰나미 우려 여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놀라운 스피드....)


이처럼 일본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재해혹은 '재난'이다. 지리적 특성상 자연 재해가 빈발하다 보니 열도는 늘 비상 대기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11년 동일본 지진으로 이 같은 경각심은 한층 고조됐다.





방재용품, 이렇게나 많다니


일본 도큐핸즈 신주쿠점의 방재 상품 코너. 비상식품부터 간이 화장실, 응급키트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레 발달한 것이 바로 방재품(防災品) 산업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비상식량부터 각종 의약품과 온열 장비, 간이침대·정수기·화장실 키트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방재품 비축이 의무인 주요 기관과 기업 외에도 일반 가정에서 쓸 수 있는 품목들을 대형 마트와 백화점, 인터넷 쇼핑몰에서 살 수 있다.



태풍 상륙 전날 한 방송에서 태풍 대피 요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우측 상단에 '올해 최강 세력, 태풍 19호. 자기 목숨과 소중한 이의 목숨을 지킨다'는 자막이 붙어 있다.  



나는 2019년 10월 '역대급 태풍(태풍 19호)'이 상륙하던 때 위기감을 느껴 비축식을 구매했다. 당시 태풍 상륙 며칠 전부터 '최강 태풍', '일본 열도 크기 위력' 등 주의를 당부하는 뉴스들이 쏟아져서 '아, 이러고 있다가 정전되고 단수되면 큰일이겠구나' 싶었다.


도큐핸즈 신주쿠점에 방재 코너가 잘 돼 있다고 해서 갔는데, 역시 '잘 돼' 있었다. '아니 이런 것도 방재 상품이야?'라는 생각이 들만큼 그 코너를 둘러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성별을 고려한 방재 세트도 인상적이었고, 추위 방지용 판초, 간편 곤로 같은 상품의 작동 원리도 흥미로웠다. 물론 이런 걸 쓰는 일이 없어야겠지만.



방재 세트 여성용, 남성용. 휴대용 난로, 건빵, 생수 등 기본 구성은 같고 성별에 따라 필요한 용품만 차이가 난다.



내 지갑을 열게 한 건 비상식품


제일 재밌었던 코너는 역시나 식품. 군대 훈련용 식품이나 건빵 정도만 생각했는데, 그것은 경기도 오산...... 이날 예산 초과해서 비축 식품을 장바구니에 마구마구 담아버렸다. 빵, 리조토, 쿠키... 이거슨 내 일상식 아니던가. 평소 먹던 것과 다른 것이 있다면 유통기한이 기~~~~~~~~~~~~~~~~~~~~~~~~~~~~~일다는 것. 아래 사진 맨 오른쪽 검은색 포장 위로 숫자가 보이는가. 10....... 10일도 아니고, 10개월도 아니고, 10년이다.


(왼쪽부터) 비상식 리조토, 메이플 시럽 맛 빵, 쿠키



자, 보라. 누가 저 포장을 보고 비상식을 떠올리겠는가. 나는 메이플 시럽 맛 빵과 치즈 쿠키(사진 오른쪽의 노란색), 그리고 데울 필요 없는 카레, 야채 주스를 샀다. 카레는 평소 먹는 그 맛이었고, 메이플 시럽 빵은 정말 최고였다. 저 캔 안에 머핀 크기의 데니쉬 빵 두 개가 들어있는데, 전자레인지에 살짝 돌리면 진한 향이 돌면서 갓 구운 빵처럼 기름지고 맛있다. 물론 그냥 먹어도 괜찮고. 7년 보존 가능하다는 치즈맛 쿠키는 사실 안 먹었다. 그리고 한국에 가지고 왔다. 유통기한 딱 되는 그 날 뜯어서 먹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이쯤 되면 '비상'이란 이름 떼도 될 듯


일본의 한 비축식 회사가 개발한 25년 보관 가능한 죽/세이엔터프라이즈 홈페이지



'맛없다', '어쩔 수 없을 때 먹는다'는 이미지가 강했던 비축 식품은 최근 ‘평시에도 먹을 수 있는 식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실제로 대형 마트의 비상식량 코너에서는 밥과 라면, 리조토, 스튜, 죽, 카레 같은 식사류는 물론 쿠키, 빵, 건빵, 양갱, 초코바 간식에 이르기까지 일반 식품코너와 비교해 뒤지지 않는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만나볼 수 있다. 뉴스 보다가 좀 놀랐던 게 유통기한 25년인 죽의 개발이었다. 아니, 이 죽엔 도대체 뭐가 들어간 것인가...


비축식의 이 같은 변화는 사실 일본의 고민거리로 떠오른 ‘식품 로스(食品ロス)’, 즉 음식물 대량 손실(폐기)과도 맞물려 있다고 한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지난 2017년 기준 과거 5년간 일본 내 17개 지자체에서 폐기한 비축 식량은 176만 끼로 폐기에 든 비용만 3억 엔에 달했다. 이렇다 보니 일본에서는 평균 3~5년짜리 비축 식량의 유통기한 마감이 임박할 즈음 관공서나 대학, 기업 등이 공짜로 이를 주민이나 학생, 사원들에게 나눠주곤 한다. 도쿄도(東京都)도 지난 2017년 이듬해 1월 말로 유통기한이 끝나는 건빵 13만 인분을 무료로 배포한 바 있다. 자연재해가 빈번한 나라에서 비상식은 필수지만, 이 '비상의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물론 다행이지만) 그만큼의 비상식 폐기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 일상에서도 먹을 수 있는 다양하고 맛있는 비상식, 유통기한이 길어 폐기를 줄일 수 있는 비상식의 개발은 그래서 필요하다.



롤링 스톡 개념을 소개하는 안내문



대량 폐기를 막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도 롤링 스톡(Rolling stock)을 권장하고 있다. 도큐핸즈에 갔을 때 좀 특이한 안내문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롤링 스톡이었다. 롤링 스톡은 비축식을 일상생활에서 소비하면서 먹은 만큼 다시 재고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자연재해에 수시로 노출되는 일본이기에 재난 대비 용품의 종류와 수가 정말 다양하고 많았다. 불 없이 음식이나 물을 데울 수 있는 키트, 간이 변기, 발열 시트... 1년 거주한 외국인의 눈엔 모든 것이 '신기한 물건'이었지만, 일본 사람들에겐 이 모든 것이 일상의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대비하고 연구하며 발전시키지만, 이를 사용하는 상황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존재.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나의 방재용품 구경은 그렇게 '처음과는 다른 생각'을 남긴 채 마무리됐다. 







※ 이 연재는 두번째 행인과 엄격한 여행자가 함께 만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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