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TS 엘리엇은 말했다.
나에게도 그해 4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이었다.
딸이 임용 시험에 합격하고 첫 발령지가 안산이었다. 광명에서 안산은 같은 경기도라 가까워 보이지만 목적지까지 대중교통으로 다니기에는 버거운 거리였다. 딸은 네 번 환승에 하루 종일 초등생 가르치는데 얼이 빠져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이런 생활도 곧 적응하겠지만 자가운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고민 끝에 중고차 거래소에서 주차 부담이 덜 한 모닝 차를 샀다. 세 식구가 모두 바빠 제대로 운전 연수를 시켜주진 못했다. 나는 수업하느라 시간 내기도 힘들었고, 운전도 시원찮아서 아침마다 학교까지 데려다줄 용기도 없었다. 항상 우리 부부의 말다툼은 아이들 문제였다.
성격이 급한 나는 아이들이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다고 요구하지 않아도, 내가 판단해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무조건 해주고 싶은 어미 마음으로 살았다.
남편은 이런 나에게
“아이들은 부모의 빈틈에서 자란다.”
말만 되풀이하면서 못 마땅해했다.
이런 부모 사이에 두 딸은 좌불안석하며
“아빠는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엄마는 지나치게 감성적인 게 문제.”
라고 한 마디씩 했다.
남편은 아무리 시간이 있어도 배우려는 딸들의 자세가 절실하지 않으면, 시도도 하지 않고 손잡아 주는 걸 꺼렸다. 스위트한 대디가 되는 걸 약간 꼴불견으로 생각하는 꼰대 기질이 있었다. 우리 부부 성향이 조금씩만 양보하고 잘 버무려졌으면 좋으련만! 성질 급한 나는 항상 맘 졸이고 빈정 상하다가 상처를 입곤 했다. 1분 1초도 아까운 고 3 시절 한국의 대부분 부모님들은 아침저녁으로 학교나 학원에 아이들 데려다주는데 정성을 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공부하는 학생은 대중교통으로 다녀야만 허벅지와 장딴지 근육이 생기고 체력이 길러진다는 말만 강하게 했다. 그럴 땐 어미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깝고 가슴이 답답했다. ‘어떻게 아빠가 그런 것도 안 해주나.’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결과만 보면 남편의 말이 맞을 때도 있었다. 겁 많은 내가 벌벌 떨면서 운전연수를 받은 것도 자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큰딸은 차는 준비되어 있지만 용기를 못 내고 거의 보름간 오며 가며 차를 바라보기만 했다. 안산까지 상당히 먼 거리에다가 어찌나 길치든지!
남편은 상당히 고지식했다. 편하기만 한 내비게이션도 아직은 살 때가 아니라고 꿈쩍도 않으니 복장이 터졌다. 준비도 없이 내비게이션 보다가 사고 난다며 그냥 운전하라고 했다. 딸은 벌벌 떨고, 지켜보는 나는 애간장이 탔다.
하지만 과정 하나하나를 건너뛸 수도 없고 헤쳐 나가야만 하는 상황들!
남편은 그간 서너 번 동승해서 갈 때는 딸이 운전하고, 올 때는 아빠가 끌고 오며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딸은 여전히 자신 없고 무섭다며 울상이었다.
어느 토요일. 그때는 토요일에도 오전 수업이 있던 시절이었다.
딸이 드디어 홀로서기를 하는 날.
나는 여느 때처럼 딸 차에 동승하는 줄 알았다. 남편은 갑자기 나에게 우리 차에 타라고 눈짓을 했다.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해하는데 딸에게 먼저 출발하란다. 남편과 나는 우리 차에 타고 뒤에서 쫓아갔다. 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혼자서 자기 판단 하에 차를 운전하고 학교까지 가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모를 것 같은 길은 아빠가 앞서다가 알 만한 길은 딸내미를 앞세우며 긴박한 수신호를 주고받는 경찰들처럼 헤쳐 나갔다.
딸이 어느 정도 운전을 하는 것 같아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어느 삼거리에서 남편은 빠이빠이 하며 전혀 다른 길로 운전대를 틀었다. 아빠 사자가 새끼 사자를 길들일 때 높은 벼랑까지 데리고 올라가 무조건 떼어 놓고 밀쳐 버리듯이~~~.
마치 전쟁터에 딸내미를 홀로 보낸 듯 조마조마한 마음.
어느 첩보 영화보다 더 긴박했고 내 가슴은 쿵쿵거렸다.
“이렇게 떨쳐버려야지 언제까지 질질 끌려다닐 거야.
이젠 저도 살길 스스로 찾아가겠지!”
너무 염려가 되어 눈물까지 흘렸던 나와는 반대로 남편은 호탕하게 웃으며 인천 영종도 바닷가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딸은 홀로서기를 할 수 있었다. 이건 아빠만이 해 줄 수 있는 독특한 방법, 살 떨리는 부성애가 눈부셨다. 내 방식으로 했다면 아마도 한 두어 달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계속 소심하게 시작해서 소심하게 끌고 다니게 했을 텐데~~~. 많은 부분에 딸이 감사해하며 혼자서 운전하고 다녔다.
하지만 갈 때는 가던 길로 잘 가는데, 올 때는 순간 길을 잘못 들어 또 다른 길로 새로운 길을 탐사하며 조금씩 적응해 갔다. 요즘 세상에 운전은 필수 자격증, 운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물론 나는 한정된 곳, 꼭 필요한 곳, 딸 집만 다니는 쫄보 운전자다. 하지만 그것이라도 운전할 수 있는 것과 전혀 할 수 없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운전이야말로 순발력이 필요하고 정말 운전에 능력이 우수한 사람이 있다.
“난 운전이 제일 쉽고 신나요. 비 오는 날 잔잔한 음악 틀고 미끄러지듯 빗길을 달려 보세요. 진짜 힐링돼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능력이 없는 나나 우리 딸은 운전은 참으로 힘들고 버거운 일이다.
홀로서기 한 며칠 후 딸은
“아빠는 사람에게 꼭 해내고 말겠다는 독기를 스스로 품게 해서 자기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다. 엄마는 느슨하게 못 하는 사람 마음을 헤아려 줘서 시도라도 해보고 싶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결국 엄마, 아빠 둘 다 꼭 필요하다.”
라고 말해서 한바탕 웃었다.
세상의 모든 아빠들은 누구보다 자기 자식이 더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 딸들은 이런 아빠를 ‘츤데레’라고 놀린다.
다가서면 톡톡 쏘는 느낌을 주는 약간은 시크한 성격의 소유자?
겉으로는 쌀쌀맞고 인정머리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아버지다.
우린 뜨끈한 매운탕과 소주 한잔 같이하며 그동안 서로 힘들었던 마음을 훌훌 털어버렸다. 아빠는 선배로서 운전할 때 지켜야 하는 팁도 주며 한결 부드러워졌다.
“우리 딸, 항상 초심 잃지 않고 안전 운행하기를 기도한다.
우리 큰딸 화이팅!
홀로서기를 축하해~~~~”
그런 딸이 벌써 교직 15년 차다. 삼 남매 엄마로 한 가정의 훌륭한 항해사로 꿋꿋이 자기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요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힘들다고 난리다. 하지만 딸은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고 비전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바쁜 생활 중에도 엄마 아빠 마음 알아주고 가끔 별식 만들었다며 초대도 한다.
삼 남매 삼시 세끼 챙기기도 힘들 텐데~~~.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다정한 말을 주고받는 것. 이런 평범한 일상이 나의 행복이다. 딸의 부름에 설레는 가슴 안고 이번엔 무슨 음식일지 상상하니 벌써 침이 고인다.
부모만 사랑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부모를 챙겨주려는 마음이 벌써 생기다니!
너무 철이 빨리 든 딸이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