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시간
누구에게나 버킷리스트가 있습니다. 나의 버킷리스트 1번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입니다. 왜 이토록 그 길을 걷고 싶은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벗어버리고 싶은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순탄하기만 하지는 않았지만 지독할 만큼 힘든 삶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 길에 버리고 오고 싶은 내가 있나 봅니다.
프랑스 남부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km의 프랑스 길을 60살인 여자 혼자 갈 수 있을까 봐 의문이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다녀왔을까? 카미노 카페이 가입하여 다른 이들의 여정도 둘러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길이라며 곳곳에 천사가 숨어있다고 용기를 북돋워 주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혼자서 웬만한 일은 할 수 있는데 40일 이상을 혼자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걸을 수 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의문이 들 때는 잠시 멈추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에 방향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언어가 통하는 제주도에서 걷기를 해 보기로 결정하고 숙소, 차량 등을 예약했습니다. 두 달 전에 예약하며 멀게만 느껴졌는데 벌써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결혼 후 혼자서 이렇게 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처음입니다.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도 고마운 마음도 듭니다. 남편과 아들 둘이서 어떻게 살아갈지 염려가 되지만 지금이 아니면 어쩌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떠나기로 결정했습니다. 기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순간 다가오는 것이니까요. 두 달이라는 시간을 정한 이유는 제주 올레길은 27길이라고 합니다. 이 길을 완주하려면 두 달은 있어야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어떤 날은 날씨가, 어떤 날은 나의 건강이 걷기를 방해할 수 있을 것이니까요. 제주 올레길을 완주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아직 걸을 수 있는 나의 건강이 무한 감사합니다.
두 달이라는 긴 시간을 집을 비우려고 생각하니 할 일이 또 산더미입니다. 집 곳곳이 정리해야 할 것들뿐입니다. 하루에 한곳씩 정리하리라 계획을 세우고 두 달간의 공백을 허락한 남편과 아들을 위해 특별식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수산시장에 가 보니 갑오징어가 제철인가 봅니다. 살아있는 녀석은 너무 비싸 수족관에서 이제 막 죽은 녀석을 한 마리 골랐습니다. 통 갑오징어찜을 해 먹으라는 주인장의 설득에 넘어가서 갑오징어 한 마리를 사서 돌아왔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쉬운 요리가 또 있을까요? 씻는 것도 흐르는 물에 대충 씻기만 하면 되고 끓는 물에 채반을 얹어 찌기만 하면 되니까요.검색해 보니 끓는 물에 25분 정도 찌면 된다고 하여 그렇게 쪄보니 아무 조치도 하지 않은 오징어의 맛이 이렇게 맛있다니 감탄이 나왔습니다. 통째로 쪄서 자르니 새까만 먹물이 오징어 몸을 덮습니다. 먹물이 마치 소스처럼 정말 맛있습니다. 요리는 역시 원재료의 싱싱함이라 다시 생각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성품이 사람에게는 원재료입니다. 나이로 인해, 편견으로 인해, 심리적 결핍으로 인해 나의 원재료가 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해산물은 상해버리면 싱싱한 상태로 되돌릴 방법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위안이 됩니다. 사람 고쳐서 쓰지 못한다고 하지만 노력이 쉽지는 않지만, 각고의 노력이 있다면 사람은 싱싱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도 싱싱한 상태로 살아가기를 바라며 나를 갈고 닦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