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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Dec 27. 2023

엄친아, 육각형 인간, 그다음은?

최근 SNS에서 ‘육각형 인간’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인다. 완벽한 육각형 인간이라는 제목의 게시글을 보고는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어렸을 때 했던 축구 게임 ‘위닝 일레븐’의 선수 능력치를 나타내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제시되었던 능력은 공격, 수비, 힘, 체력, 속도,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완벽한 육각형 능력치를 가진 선수는 드물었고, 나는 현실의 내 모습을 투영해서 속도나 기술이 있는 선수를 주로 선발했다.

위닝 일레븐 8 게임 화면

게임에 커스텀으로 모든 능력치를 내가 직접 조정할 수 있는 메뉴도 있었다. 하지만 비록 게임이라도 육각형 능력치가 꽉 찬 선수는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능력치가 꽉 찬 육각형의 선수는 한 명의 존재만으로도 게임 균형을 깨트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축구는 팀 스포츠인데, 혼자서도 몇 골이든 넣는 것이 가능했다. 기술 능력치가 높아서 공을 잘 뺏기지 않을뿐더러, 다른 선수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의 속도와 강력한 슛은 항상 득점으로 이어졌다. 어차피 완벽한 육각형의 선수가 있으면 게임에서 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이후부터는 게임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가상인 게임에서 마저 현실감은 중요한 몰입 요소였다.


현실감을 기반으로 재밌게 했던 축구 게임 능력치가 현실에서 어떤 것으로 치환되어 있을지 궁금했다. 완벽한 육각형 인간에 대한 게시물은 내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나를 대입해 보기 위해 능력을 살펴봤다. 제시된 여섯 가지 능력은 외모, 성격, 학력, 자산, 직업, 집안이었다. 제시된 것은 능력이라고 볼 수 없을뿐더러, 내가 흔히 알고 있는 인간의 능력과는 생경한 것이었다. 또한 능력별 기준치가 제시되어 있지 않은 것도 의도적인 특징인 듯했다.

ⓒ 미래의 창. All right reserved.

육각형을 보고 한참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완벽한 인간에 대한 선망을 나타내는 상징쯤으로 여겨야 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완벽한 인간에 대한 선망은 최근에만 유행했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내 기억에서도 선명히 존재하는데, 이를 테면 상상 속의 동물로 불리던 ‘엄친아’도 같은 맥락이지 싶다. 실제로도 존재하는 엄친아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실상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허점을 활용했다. 이는 타인과의 비교를 바탕으로 자녀의 행동과 태도를 바꾸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완벽한 육각형 인간’이 '엄친아'와 다른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조적인 태도다. 내 노력이나 선택으로 바꿀 수 없는 능력을 선망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블랙 코미디이자 방어기제다. 현실감 없는 존재를 선망하며, 달성할 수 없는 현실을 웃어넘기기 위한 것이다. 또한 결과적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함으로써 내 노력에 대한 결과의 예상 기대치를 낮추며 스스로의 마음을 돌보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이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혼자 마음 건강을 돌보며 살아가려는 노력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 한국교육신문. All right reserved.

마지막으로 ‘엄친아’와 달라진 것은 주변인이 비교를 통해 간접적으로 내 삶을 바꾸려 했다면, ‘완벽한 육각형 인간’을 선망하는 것은 스스로가 타인과의 삶을 직접 비교하며 변화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비교하는 주체가 달라졌고, 변화를 포기한다. ‘완벽한 육각형 인간’은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이미 완벽에 가까울 수도, 그 도형의 크기가 한없이 작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평가 기준이 없어서 내 기준치와 평균에 대한 추정을 상상해 대입한다면, 나는 육각형 인간이었다. 물론 그 크기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크진 않고, 중간정도로 작았지만 말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나를 더욱 발전이 가능한 사람으로 바라보기도, 이미 완벽한 육각형 인간으로 바라보기도, 현재는 부족해서 점에 수렴할 만큼 작은 도형으로 바라보게도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도형의 크기가 아니다. 스스로 추정하는 기준치나 평균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같을 수 있으며,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육각형 인간'에 대한 선망을 이용하는 것 마저 각자도생의 사회이기 때문에 개인에게 달려있다.


아마 완벽에 가깝거나 달성가능한 정도로 육각형을 상상하는 사람이 많았다면, 이 게시물이 SNS에서 화제가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화제가 되는 이유를 감히 추측하건대 대부분 꽉 찬 육각형은 불가능하다고 느끼지만, 완벽함에 대한 선망을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완벽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 내가 게임에서 꽉 찬 육각형 선수로 게임을 즐기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한 육각형 인간'도 무너진 현실감으로 고충이 있을지 모른다. 그 누구도 완벽함이 가지는 불완전성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개인에게 부여된 완벽함에 대한 강박을 사회 공동의 것으로 돌려야 한다.


완벽한 사람에 대한 선망은 완벽한 사람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완벽함의 세상에는 사랑받을 자격을 갖춘 이가 없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간다. 완벽함에 대한 선망을 사회 단위에서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서로 말하며, 완벽하지 않기에 개성 있는 모습을 용인하고, 완벽하지 않으므로 더 나은 삶을 위해 변화할 수 있다고 믿음을 나누어야 한다. 단지 현재의 모습에 안주하자는 것이 아니다. 개인에게 부여된 완벽함에 대한 강박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친아'와 '육각형 인간' 다음에도 완벽함에 대한 신조어는 생길 것이다. 다만 그것은 개인에게 온전히 책임을 전가하는 형태는 아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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