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시용 독서'와 '완벽주의'의 잘못된 만남
나는 대학생 때부터 과시용 독서를 했다. 나에게 책은 곧 베스트셀러였고, 그 외의 책은 읽지 않았다. <정의란 무엇인가>, <사피엔스>, <총, 균, 쇠>로 대표되는 벽돌책을 그때 읽었다. 책 읽는 습관이 전혀 없었기에 한 권을 읽기까지 반년 이상 걸린 것도 많았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벽돌책을 읽는 것보다 내가 벽돌책 읽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지식 습득이나 깨달음보다 과시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나는 뒤로 매는 책가방이 아닌, 옆으로 매는 크로스백을 들고 다녔다. 이 가방에는 태블릿 PC인 아이패드 정도 들어가는 크기다. 벽돌책은 들어갈 공간이 없으니 자연스레 손에 들고 다녔고, 사람들은 내가 들고 다니는 책에 찬사를 보냈다. 대부분 찬사는 비슷했다. '라면 받침으로 쓰면 딱일 텐데, 나였으면 반도 못 읽었을 텐데, 어려워 반도 못 읽었네.'라는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무거운 벽돌책이 무겁지 않게 되었다.
제대로 과시하기 위해 적당히 아는 체도 곁들여야 한다. 하지만 간과했던 것이 있다. 나는 완벽주의적 성향이다. 적당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고, 결국 끝까지 이해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해한 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면 내가 마치 마이클 샌델이나 재레드 다이아몬드, 유발 하라리처럼 세계의 석학이 된 듯했다. 과시용 독서와 완벽주의는 시너지가 좋았고, 그렇게 잘못된 만남이 지속되었다.
과시용 독서를 하다가 <분노사회>라는 책을 만났다. 20대와 3년 차의 사회복지사, 분노사회는 조합도 좋지만 과시에도 성공적이다. 다만 과시를 넘어 정지우 작가의 사회 담론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어서, 난생처음으로 북토크에 갔다. 첫 북토크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분노를 표현하는 동시에 섬세한 글이라서 여성 작가일 것이라 추측하던 예상이 빗나가서 놀랐고, 선망하는 작가가 눈앞에 있어서 벅찼고, 다른 독자가 작가에게 던진 유쾌한 질문에는 아리송함 마저 느꼈기 때문이다.
'정지우'라는 보금자리
"분노사회를 쓰신 분이, 어떻게 행복을 이야기하실 수가 있죠?" 정지우 작가를 비롯하여 북토크에 나를 제외한 모두는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정지우 작가를 <분노사회>로만 알고 있었기에 어리둥절했다. 그는 다소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삶에 대한 성찰과 쓰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듣고, 나의 완벽주의적인 성향까지 더해서 <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라는 에세이 책을 샀다.
그의 삶에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은 중요한 듯했고, 그를 동경했기에 나도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애써 쓴 나의 글을 읽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꾸준히 썼다. 쓰다 보니 '브런치'에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워낙 작가 신청 단계에서 떨어지는 후기를 많이 봤기에, 한 번에 승인되었을 때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무작정 인스타그램에 정지우 작가를 태그하고 감사 인사를 남겼다.
그는 나의 감사 인사를 자신의 스토리에 게시했다. 보금자리에 억지로 발을 들이민 것은 그때부터였던 듯하다. 그가 진행하는 3개월 간의 글쓰기 모임 이후에는 확실히 나의 글을 읽는 사람이 늘었다. '다음(DAUM)'이라는 포털의 메인 화면에도 자주 등장하게 됐다. 또한 그가 운영하는 <세상의 모든 문화>라는 뉴스레터에 필진으로 활동도 하고,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출간될 공저에도 참여했다.
만약에 '정지우 엘리트 코스'가 있다면, 나는 이를 모두 경험한 셈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만든 보금자리라는 것을 안다. 그는 자신과 글쓰기로 맺어진 사람이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금자리를 만든다. 나는 그 보금자리에서 쓰는 것에 어려움이 생길 때, 보호가 필요한 아기새처럼 그와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그는 나의 고민을 진실되게 듣고는 조언했다.
떠나면서도 가까워지는 자립
아기새는 어미새 행동을 보고 배운다. 그는 '집요하게 쓰는 사람들'이라는 네이버 카페를 만들어서 매주 주제를 선정해서 자신의 보금자리에 있는 아기새가 쓰는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도록 권하고, 브런치에도 2개의 글쓰기 매거진을 만들어 꾸준히 쓰도록 동기부여 하고, 글쓰기를 권하는 글도 쓴다. 나는 정지우식 엘리트 코스를 모두 참여한 사람으로서 그의 행동을 보고 배웠다.
나는 이 보금자리를 떠나야 함을 명확하게 안다. 내가 언제까지고 그의 보금자리에 있을 수 없다. 그는 글쓰기 모임에서 "이제는 하산해서 자신만의 글쓰기를 이어갈 것"을 말한다. 좇아내는 느낌이라기보다 자립하면서도 꾸준하게 글쓰기를 이어갔으면 하는 소망도 함께 전한다. 그의 보금자리가 무한정한 공간과 에너지가 아님을 알기에 나는 이제 자립을 시도한다.
그가 신변잡기보다 하나의 주제로 연재해 보는 것을 추천해서 <가난을 팔겠습니다>를 목표까지 썼다. 자립을 시도하면서, 보금자리 만들기 역시 도전한다. 아직 그가 보금자리 형태로는 만들지 않은 인스타그램 매거진을 쌓고 있다. 보금자리라 부르기에는 조회수가 많지 않아 그의 보금자리에 머무는 사람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정도 보금자리라 불러도 될 만큼 조회수가 나오면, 함께 아기새였던 사람들에게 공개해서 운영해 볼 계획이다.
나는 그의 보금자리에서 자립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별이라거나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안온한 보금자리가 싫어서 자립하는 것도 아니다. 쓰는 사람을 돕는 그의 원대한 계획에 나도 묵묵히 동참하는 것이다. 쓰는 사람으로서 성장과 내가 만든 보금자리를 포근하게 만드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나는 떠나면서도 그의 발자취에 한 걸음 가까워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