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존은 기적의 증거야." 전각 장애인 영규는 말한다. 지금은 당연하다 여길 인권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을 견딘 영규의 절규는 처절하다. 영규는 어렸을 때부터 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놀림받고, 누가 때리는지 모르는 채 맞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추악함은 멸시해도 괜찮은 것이라 배웠다.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생존 전략이자, 전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살아있는 기적을 만드는 생존 노력이다.
아내인 영희는 장애가 없지만 비슷한 성장 경험을 한다. 타인에게 서슴지 않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고, 타인의 시선에서 못생긴 사람으로 손가락질받고, '똥 걸레'라고 멸시해도 괜찮은 사람이 된다. 영희는 영규와 정확하게 같은 생존 전략을 쓴다. 묵묵하게 모든 수모를 견딘다. 이 전략은 효과가 있다. 효과가 있으니, 두 사람은 같은 전략을 계속해서 강화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영희는 영규로부터 자신이 아무렇게나 대해도 괜찮은 사람이 아님을, 다른 사람처럼 자신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영희는 영규를 만나기 전까지 효과적이었던 생존 전략을 과감하게 버린다. 그녀는 고통받는 주위 사람의 불의에 맞서고, 자신을 향한 부조리한 시선에 맞서고, 무자비한 폭력 앞에 끝까지 저항한다.
그러나 이제야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 영희는 자신을 타인들의 멸시로부터 구원해 준 영규에게 제지당하면서 비극을 맞이한다. 반면 영규는 여전히 깊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전날까지만 해도 심성 고운 아내였지만, 유일하게 믿은 아내가 자신을 놀리는 데 앞장선다 생각하며 일순간에 증오의 대상이 된다. 마음을 준만큼이나 배신의 감정은 북받쳤을 테고 급기야 아내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영규는 아들인 동환에게 과거의 전말을 말해주며, 자신이 저지른 아내 살인을 정당화하려 한다. 심지어 자신이 과거에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생존 전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벌레만도 못하다며 아들에게 동의를 강요한다. 영규는 자신이 아름다움과 추함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의 행동이 추하기보다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아름다움임을 절규한다.
하지만 영규가 아름다움과 추함을 냉정히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인지 의문이다. 그는 앞이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도장에 글씨를 팔 수 있다. 이 정도 미세한 감각을 지녔다면 자신의 아내가 못생긴 괴물의 얼굴이 아님은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테다. 그럼에도 주위 사람의 말과 어렸을 때부터 쌓인 자기 착취적 피해의식으로 아내가 괴물처럼 생긴 것이라 믿는다.
심지어 취재하러 온 프로듀서가 자신의 손에 있는 흉터를 묻자, 황급히 감춘다. 흉터는 아내를 살해할 때 아내가 남긴 저항의 흔적이지만, 일 배우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 거짓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이 추악함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는 아름다운 도장을 만드는 것으로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작가가 되지만, 어렸을 때부터 점철된 피해의식으로 아름다움을 추측하지 못하는 상태다.
비단 영규의 잘못만은 아니다. 피해의식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사회의 몫이기 때문이다. 장애가 있는 영규 말고, 못생긴 얼굴을 갖지 않은 영희 역시 피해의식을 가졌다. 영화는 피해의식이 어떻게 사람을 지배하고, 처절하게 발현되고, 극복하는지에 관한 영규의 대비로 내세워진다. 장애를 가졌지만 피해의식과 함께 기적처럼 생존한 영규와 기적처럼 피해의식을 떨쳐냈지만 생존하지 못한 영희다. 이를 현대 사회의 시선인 아들의 눈으로 조명한다.
프로듀서는 아들인 동환에게 "오늘 유독 아버지 영규를 닮았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아버지 얼굴을 닮았다는 말이 아니다. "유독 오늘" 닮아 보인 까닭은 동환이 아버지에게 부정적인 장면을 잘라내고, 아버지의 피해의식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번 더 확장되어 현시대를 상징하는 동환에게 '피해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