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aarami’s Diary(39)
12월 9일
또다시 정전이다. 이번엔 스리랑카 전역에 걸쳐, 오후에 정전이 됐다. 5시쯤 시작된 정전은 저녁 9시까지 이어졌다. 해가 있을 때 정전이 되는 건 그런대로 견딜만하다. 해가 진 후에는 상황이 상당히 달라진다.
정전이 시작되던 때에 나는 밖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자가발전 시설을 갖춘 쇼핑몰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으러 중식당에 갔다. 전정으로 냉방이 되지 않고 어둡기도 했지만 별로 심각성을 느끼지 못했다. 음식은 맛있었고 아직 해가 지지 않아서 사물을 식별하는 데 문제가 없었고, 날씨도 별로 덥지 않았으니 문제 될 게 없었다. 무엇보다 의지가 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겁날 게 없었다.
식사를 끝내고 계산서를 요청했을 때에서야 정전의 위력을 조금 실감할 수 있었다. 종업원은 손전등 불빛 아래서 손으로 적은 계산서를 주면서 말했다. "정전 때문에 카드 계산이 안 됩니다."
우리는 주섬주섬 현금을 꺼내 계산을 하고 헤어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평소에 이정표 삼았던 상점의 간판 조명이 꺼져있어서 집에 가는 길이 낯설게 느껴졌다. 정전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휴대폰 손전등을 켜서 열쇠를 찾고, 열쇠구멍을 찾아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헤드랜턴과 손전등을 꺼내서 켜고 휴대폰은 절전 모드로 바꾸었다. 밤새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휴대폰을 충전할 수 없을 것이다. 보조배터리를 손전등 옆에 두고 앉아서 고민을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지금 씻을 것인가 정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씻을 것인가. 목이 마르지만 냉장고 문은 열지 않기로 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냉기가 빠져나오면 안 된다. 거금을 주고 산 김차가 들어있으니까.
집안에는 손전등 성능만큼의 불빛만 존재한다. 가끔씩 번개가 칠 때마다 밝아지기는 하지만 그건 찰나에 불과하다. 약간의 빛과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 고민은 깊어진다. 저 어둠 속에서 씻는 동안 무서운 생각을 한순간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천정에서 내려온 머리카락이나 2층 높이(우리나라 기준으로는 3층)의 창밖에 어른거리는 얼굴 같은 것들을. 온수기가 작동하지 않아서 찬물로 샤워를 해야 하는데 심장에 무리가 가지는 않을까.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릴 수 없는 데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까.(우기라서 밤에는 늘 비가 왔고, 기온이 비교적 낮았다.) 어둠 속에서 거울을 보며 얼굴에 로션을 바르는 건 괜찮을까. 차라리 아예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 덜 무섭지 않을까.
각종 정전 피해사례가 카카오톡과 와츠앱으로 전해졌다. 누구는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고 있었는데 전기가 나갔다고 하고, 누구는 냉장고 속 음식물을 걱정하고 나 같은 겁쟁이들은 공포에 질려있다.
그나마 배가 불러서 다행이다. 이런 날 내내 집에 혼자 있었다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저녁이나마 먹을 수 있었을까. 동료들과 함께 있는 동안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건만, 혼자 있으니 씻지도 못한다. 하루종일 밖에서 이것저것 볼일을 보느라 혹사당한 몸이 이제 그만 누우라고 성화인데, 나는 고민을 끝낼 수가 없다.
사실, 정전을 핑계 삼아 안 씻고 그냥 침대로 기어들고 싶은데, 겨드랑이에 고여있던 땀은 이미 말랐으니 모른 척하더라도 하루종일 조리를 신고 돌아다닌 발이 너무 더럽다. 발만 씻고 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