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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 Nov 15. 2021

병아리 장갑이 뭐예요?

한국어 학급의 일상

  혓바닥은 활이며, 혓바닥을 굴려 나가는 말은 화살이다. 한 번 쏘면 되돌릴 수 없는 화살처럼 말도 뱉으면 주워 담을 수 없다. 스스로에게 화살을 쏠 수 없는 것처럼 말도 나보다 남을 향한다. 화살의 핵심은 잘 벼린 화살촉이다. 말의 화살촉은 내용이다. 잘 벼린 화살촉이 날카로울수록 표적에 깊숙이 꽂힌다. 말의 내용 역시 날카로울수록 다른 사람에게 깊이 꽂힌다. 말 화살이 타인의 이성이 아닌 감성을 향했을 때는 더욱 깊이 꽂힌다. 이성은 각자의 갑옷을 두르고 단단하기 때문에, 말 화살로 생채기를 내려면 같은 곳에 여러 번, 강하게 맞혀야 한다. 반면 감성은 이성보다 무르고 말랑해서 하나의 화살로도 큰 상처가 난다. 단 한 번에 깊숙이 꽂혀 뺄 수 없기도 하다.


  최근 내 가슴에 박힌 화살이 있다. ‘암 걸리겠네 ‘ 화살이다. 꽤 오래전부터 SNS 등 오프라인에서 날아다니던 화살이다. 가상공간을 휙휙 날아다녀 눈에 거슬리지만 애써 무시했다. 가상공간에서만 날아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실제 공간의 일상 대화에서 그 화살을 맞게 되었고, 내 가슴에 깊이 박혔다. 이 불쾌한 표현의 의미는 ‘일이 너무 안 풀려 답답하다 ‘다. 답답함의 정도가 극에 달해 암이라는 큰 병에 걸릴 것 같다는 표현이다. ‘암 걸리겠다 ‘ 표현은 내용과 어조가 강하여 화자가 느끼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잘 전달한다. 꽤 실감 나서 화자의 답답하고 절절한 심정을 공감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날것인 만큼 화살 끝이 날카롭다. 깊은 상처가 생긴다. 암은 우리나라 사망원인 1위다. 흔하지 않길 바라지만, 주변에 암이 흔하다. 당사자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있는 사람이 이 표현을 듣는 다면, 말하는 사람의 답답한 심정을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듣는 사람의 가슴은 날카로운 말 화살로 너덜너덜할 것이다.


  얼마 전 수업하다 말 화살이 내 가슴에 박혀 숨이 막혔다. 수업은 특별하지 않았다. 평소의 수업과 다를 게 없었다. 주제는 주방이었고, 아이들은 언제나 음식에 대해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교재에 주방 그림이 삽입되어 있어서, 주방 그림 속 물건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름을 배웠다. 냄비, 국자, 가스레인지 주욱 읊고 있는데 아이가 그림 속 한 물건을 가리키며 ‘병아리 장갑’이라 했다. 고기로는 모자라고, 계란으로는 넘친 병아리가 왜 갑자기 나올까 싶었는데, ‘벙어리장갑’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병아리가 아니라 벙어리!’ 라며 아이의 말을 수정하려는데 입을 열 수 없었다. 교사로서 오류는 수정을 하긴 해야 하는데, ‘병아리’가 아닌 ‘벙어리’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입을 뗄 수 도 없었고, 그대로 다물 수도 없었다. 결국 벙어리로 수정하며 벙어리는 다른 사람을 안 좋게 말하는 이름이니 안 쓰는 게 좋다고 했다. 순간, 눈에 엄지가 띄어 ‘엄지 장갑이라고 하자’로 적당히 얼버무렸다.


  나는 부끄러웠다. 이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가 벙어리장갑을 알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고, 여전히 일상 물건의 이름에 장애를 비하하는 표현이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무엇보다도 그 순간까지 벙어리장갑 이름의 폭력성을 의심하지 않은 내가 부끄러웠다. 스스로를 감수성이 뛰어나고, 민감하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무식하고 몰라서 계속 사용했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어떠한 폭력도 무식이나 무지가 면죄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가 한국어를 충분히 잘하게 되었을 때, 벙어리장갑의 속 뜻을 알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할까? 누군가를 비하하는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물건 이름에 붙이는 한국어를 어떻게 생각할까? 폭력적인 언어는 품격이 없을뿐더러 가치도 떨어진다. 최근 젠더 이슈가 커지면서 성중립 단어의 사용에 관심이 높다. 이러한 관심이 한국어의 품격과 가치를 높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발판 삼아 아직 한국어에 남아있는 차별적 단어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 역시 아이들과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한 단어, 한 단어를 깊게 생각해야겠다.


 * 수업이 끝나고 검색해보니 사회복지법인 ‘엔젤스헤이븐’이라는 단체에서 ‘손 모아 장갑’으로 바꾸어 부르자는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내가 얼떨결에 말했던 ‘엄지 장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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