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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Apr 02. 2024

반짝이는 <댓글부대>

<댓글부대 Troll Factory>(2024, 안국진 감독님)


장강명 작가님의 원작을 참 좋아한다.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관객의 입장에서 기대도 됐고,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유명한 원작을 토대로 작품을 만든다니 얼마나 부담이 될까 하는 혼자만의 감정 이입도 해봤다. 결과적으로 내게 <댓글부대>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잊혀지지 않는 셋 업이 하나 있다. 영화의 초중반 혹은 중반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삼인조(찡뻤킹, 찻탓캇, 팹택)가 규모가 큰 새로운 미션(?)을 제안 받은 뒤 뭔가 고민하는 장면이었다. 이 때 팹택이 찡뻤킹과 찻탓캇의 사이에 자리해서 찡뻤킹을 보면서 한 마디 했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반대쪽에 있는 찻탓캇을 보며 한 마디 하는 것을 반복하는 액션이 있다. 이 때 팹택이 찡뻤킹을 볼 때는 설정된 광원의 색온도가 낮아서 앰버 계열의 색이 묻는데, 다시 반대쪽을 보면 밖으로 부터 들어오는(테마파크 관람차로 추정되는) 높은 색온도의 빛이 푸르스름한 색을 얼굴에 칠해 버린다. 양가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팹택이라는 인물과, 결과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는 새 미션의 성질 혹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삼인조의 딜레마를 빛으로 선명하게 나타내는 셋 업이다. 도파민을 자극하는 짧은 영상이 주된 경향이 되고 있는 시대(혹은 실제가 아닌 가상의 무언가나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이 득세하는 요즘) '손과 빛으로 하나씩 빚어낸 정교한 세팅'이 '서사와 체계적으로’ 맞물려 ‘실제 배우의 훌륭한 연기'와 함께 풍부한 레이어를 만들어내는 광경을 본다는 것은 귀하고 황홀한 경험이다.



이 감상은 정확히 영화의 후반부, 감정적 상태에 빠진 팹택이 풀 샷 사이즈 정면각에서 현란하게 변화하는 테마파크 관람차의 불빛을 받으며 카멜레온처럼 혼란스러운 빛들의 현신 마냥 움직이는 그 액션을 통해 한 번 더 반복된다. 안국진 감독님의 섬세함과 조형래 촬영감독님의 빛에 대한 예민한 감각이 빚어낸 아름다운 쇼트였다. 나는 그런 쇼트를 보는 것이 좋다. 매체의 성질이 고유하게 표현되면서 그 의미를 획득하는 장면들이 좋다. 그런 것들이 결국에는 매체의 생명력을 연장시킨다고 생각한다. 그 시도가 유의미하면 당연히 좋고 설령 다소 무의미한 지점이 있어도 온통 타성에 젖은 것 투성이 일 때 보다는 매력적일 때가 있는 것 같다.(그것이 상업영화라 할지라도!) 그런 측면에서 - 이와 같은 감상의 순간들로 인해 - <댓글부대>는 여러 순간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영화로 다가온다.





수없이 이어지는 나레이션의 흐름들도 그 맥락을 잘 갖추고 있어서 듣기에 좋았다. 결국 이 이야기를 말로써 들려주어야 하는 필요성이 결말부에 드러나는 구조로 되어 있어서 많은 나레이션들이 한 순간 의미를 갖게 되는 그 체계가 좋았다. 이런 나레이션 역시 대개는 구태의연한 목적을 가지고 흘러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 지점을 빗겨 갔다는 점이 미덕인 것 같다.



전반적으로 데이빗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를 연상시키는 음악이나 특정하게 닫힌 결말이라고 하기엔 반쯤 열려 있는 - 이 역시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 같은 작품을 연상시키는 - 분위기도 매력적이었다. 물론 이것은 데이빗 핀처를 매우 좋아하는 필자가 혼자만의 사고체계에 각종 신호들을 끼워맞춘 감상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어쨌든 다소 열린 듯한 결말로 진행되는 구조를 가질 때 그 테마가 더 선명해 진다고 생각한다. 진위를 분별하기 어려운 세상, 다시 말해 진짜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을 구분하기 어렵게 된 자본주의 세상의 속임수는 매일매일 화이트홀처럼 막대하고 무자비하게 인간들 사이로 방출되어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어떻게 무언가를 맺고 끊는 닫힘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원하는 관객에게는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이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는 텍스트로 다가올 수도 있다.(물론 나는 과거 그렇게 생각하는 동료에게 무엄하다고 말하며 싸운적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는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누구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는지 개인이 알 수 없는 사회를 맞이했다. 25년전 매트릭스 속의 네오는 내가 시스템 안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자각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쉽지 않은 흐름 속에 인간이 놓여 있는 것이다. 연쇄살인마가 누구인지는 커녕 내가 지금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기 어려운 시공간 속에 우리가 산다.



그러니 서사적 카타르시스를 배반하면 좀 어떠랴.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았는지 여전히 헤매고 있는지 명료하지 않으면 어떠랴. 유사 디스토피아 세계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노라면 이러한 구조는 오히려 필연적으로 쫓아오는 구성의 묘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말이다. 좌측의 빛과 우측의 빛이 한데 섞이고 혼돈스럽기 그지 없는 암울한 서사와 비현실적 테마파크의 정서가 공존하는 잡탕 속이라면, 시민의 모든 것을 잠식하는 그 불안과 공포의 주체가 이처럼 오색찬란한 현혹의 빛깔을 뒤집어쓴 채 다가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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