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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May 01. 2024

선 넘기_<챌린저스>

<Challengers>(2024, 루카 구아다니노)

역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다웠다.

<챌린저스>는 정말이지 유쾌하고 음흉한 작품이다. <아이 엠 러브 I am love>(2009)에서 음식 한 입에 여성의 근원적 욕망이 뿜어져 나오는 씬을 어떻게 연출했는지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챌린저스>를 보면서 낄낄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을 것이다. 육감적 본능을 이토록 엉큼한 방식으로 그려내는 연출자가 또 있을까. 



이 이야기는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특이한 것은 영화 내내 각 남녀의 애정전선과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혼재 시켜놓고 그럴싸한 서사구조로 이를 평범한 치정 이야기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챌린저스>에서 '내 친구가 내 여자와 잤을까?'라는 의심으로부터 파생되는 분노는 '나의 여자'에 대한 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사랑하는 친구'가 '나를 내버려두고 다른 사람과' 라는 묘한 관계망 까지 침투하는 감정이다. 동성 친구라는 관계를 다분히 관능적인 긴장 속에서 그려내는 몇 가지 씬들을 보노라면 작품은 이와 같은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결코 평범한 치정이 아닌, 인물 간 내재된 다방향의 성적 욕구와 끌림을 과감한 방식으로 풀어낸 텍스트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챌린저스>가 좋은 점은 바로 그 과감함에 있다. 그는 형식적 실험을 추구한다. 중요한 정서적 순간마다 리얼리티의 선을 넘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그 실험은 매체적 특성이나 자기반영적 태도를 수반한다. 이번에는 또 어떤 실험을 했을지가 매번 궁금해진다. (그런 면에서 오히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작품은 심심한 편이었다.) 



<챌린저스>의 백미가 마지막 두 남자의 테니스 경기 장면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형식적 실험은 통상 선을 넘는다는 개념으로 거칠게 버무려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가 시종일관 두 사람 사이의 가상선을 상정한 카메라 셋 업과 이를 무너뜨리는 POV로 점철되어 있고, 때로는 공의 시점으로 넘어 갔다가 롱 테이크로 이어지는 등 보편적인 격을 적절히 파괴하는 모양새를 지녔다. 가장 좋았던 컷은 카메라가 땅 속으로 들어가는 앵글이었는데 정말이지 이 물리적 테두리를 가볍게 무시하는 감독의 선택을 보면서 어쩜 이토록 대담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단언하건대 루카 구아다니노는 매번 새로움을 지향하고 있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그 어떤 테니스-삼각관계 영화와도 닮아있지 않다. 구태의연함을 쫓지 않고 언제나 그렇듯 그것을 양식적 측면으로 구현해 냈다는 점이 특히 훌륭하다. 이 작품은 이후 등장할 많은 유사 소재 영화의 레퍼런스가 될 것이다. 




어느 지점에서는 지나치게 잔혹하고 과하다 싶은 카메라 워크나 연기 디렉팅등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다소 정신이 없고 자기반영적-판타지를 드러내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 생경함이 눈에 거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루카 구아다니노는 그에 우려를 나타내는 모든 이들과 '맞다이'를 뜰 각오가 된 것처럼 보인다. 모든 요소가 갈수록 현란해지기 때문이다. 혼돈이 이 영화의 톤앤매너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챌린저스>가 혼돈과 그로인한 긴장을 가져오는 또 다른 방법 중 하나는 시간놀이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하나의 중요한 테니스 경기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마음대로 오고가는 구성인 점도 그를 반영하고, 슬로우모션의 활용도 이러한 시간놀이의 관념을 투사한다. 슬로우모션이 자아내는 서스펜스 효과는 물론이고 그 흐름 속에서 점점 변해가는 인물의 표정과 감정 상태를 관찰하게 되는 순간도 유머러스하다. 발터 벤야민이 영화가 가진 여러 기술 가운데 '시간의 조절과 인간의 보편적 능력 이상의 관찰 기회 부여'에 큰 의미를 두었던 것을 기억하면 루카 구아다니노는 그 누구보다 영화의 미덕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노는 장인 중의 한 명이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이탈리아 영화들의 맛과 멋은 언제나 그 풍미가 좋고 때로는 경이를 때로는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그 땅의 문화적 유산이 부럽기만하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키메라>를 만든 알리체 로르와커(<행복한 라짜로>는 그 해 최고의 영화였다)나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들이 당대 새로운 지형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진다. 조금만 돌아보면 난니 모레티 같은 감독이 있고, 모더니즘의 시대로 가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있다. 또한 신사실주의와 영합된 시절의 페데리코 펠리니, 루치노 비스콘티, 로베르토 로셀리니 같은 이름들도 머릿속을 부유한다. 루치노 비스콘티의 <센소>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봤을 때가 기억난다. 그 화려함과 웅장함, 비스콘티의 지도아래 선택된 수많은 예술적 방향들은 스토리의 재미를 떠나서 보는 이를 전율하게 만드는 지점이 있었다. 펠리니의 <8과 2분의 1>같은 작품이 선택한 미적 영역은 어떠한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챌린저스>의 재미는 스토리에서 나온다기 보다(어떻게 보면 서사-내러티브의 구성은 유려하다고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영화가 가지는 매체적 특성이 이 뛰어난 이탈리아 감독의 손 안에서 얼마나 새롭게 조각되었는가를 확인하는데 놓여있다. 시시각각 큰 볼륨으로 흘러나오는 음악과 배우들의 매력적인 연기를 보는 것은 이 체험에 황홀감을 더해준다. 다시 말하지만 <챌린저스>는 테니스와 관련된 영화-드라마를 기획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여다 볼만한 텍스트로 한 동안 남을 것이다. 어떻게 카메라를 땅 속에 박을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한 선수와 다른 선수를 심판을 사이에 두고 한 호흡으로 연결하는 카메라 워크를 선택했을까.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이 하나도 없다. 곱씹어 볼 수록 신기하고 유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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