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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Apr 13. 2024

안녕, 또래명과

시시콜콜한 이야기


*1 챕터는 2013년도에 작성한 글을 약간 다듬은 것입니다.

1.

집 근처 정류장에 있던 '라 크렘' 이라는 빵집은 맞은 편에 대형 프랜차이자 빵집(P모 빵집)이 들어오면서 문을 닫았다. 그 보다 좀 더 아래 쪽에 위치한, 이 동네에서 좀 오래 장사를 했던 '아해랑' 이라는 빵집도 한동안 잘 견디는가 싶더니만 문을 닫았다.



오늘 나가보니 아해랑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또 다시 새 빵집이 들어와 있었다. 역시 한 업태가 오래 자리 잡았던 곳에 같은 업태가 들어오기는 쉬운 법. 문을 열고 들어가서 빵을 여러개 골랐다. 다 올려놓으니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께서 꽤 큰 빵을 서비스로 넣어주셨다. 결재 금액은 6,700원. 마음 속으로 조금 놀라며, 'P 빵집'에서 샀으면 만 원 정도 했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했다.



집에 와서 빵을 먹어보니 생각보다 꽤 맛있었다. '역시.. 프랜차이즈와 다른 개인 빵집의 맛이란..' 대형마트 옆의 재래시장에서 좋은 상품을 발견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괜시리 미워지는 P빵집이었다. 앞으로 새로 문을 연 이 빵집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별로 없다. 동네 빵집을 사랑해야지.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P빵집 문을 아침마다 열고 손님유치를 위해 힘쓰고 계신 주인 아주머니와 그 곁에서 최저에 가까운 시급을 받아가며 일하고 있을 아르바이트 생의 모습을 생각하니 그 또한 씁쓸한 것이었다. 내가 P빵집을 안 간다고 한 들, 손해 보는 건 이리저리 돈을 모아 창업에 도전해 보리라 마음 먹었던 평범한 주인 댁들일터. 과연 기업 - 수뇌부/기득권 - 이 손해를 볼까.



문득 N유업 유제품을 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관련한 불매운동에 어쩔 줄 몰라하는 대리점주가 있을 수도 있다는 - 물론 온라인에 떠도는 정보는 모두 믿기가 어려운 법이지만 - 생각이 들었다. 댓글들을 보니 그런 점주가 존재한다면, 그건 기업의 잘못이니 고소를 하고 돈을 받아내야 될 일들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들 있었다.



어떤 사건을 멜로드라마로 몰고 가는 건 위험할 때가 있지만 난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뭐 그냥 저냥 퇴직하고 N유업 관련된 사업장을 차리고 근근이 벌이하고 있다가 애먼데서 일이 터지는 바람에 수입은 줄어들고 재고는 쌓이고 근심도 쌓여갈 어느 누군가에 대하여. 그렇다고 악덕기업 상품을 웬만하면 멀리하고 싶다는 감정은 변할길이 없으니, 거 참,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이 기업이, 이 사회가, 이 시스템이 어떻게 보듬어 줄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런 것 같다. 누가봐도 옳다 생각되는 어떤 가치가 있고 정의가 있고, 그 위에 돈이 있고 정치가 있다. 분야를 막론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느슨한 정책으로 둥글게 둥글게 표백하다보면 벽과 표면 사이 빈 틈에 끼어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사각지대의 사람들이 생긴다. 굴레와 굴레 사이에 끼어 있는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이 만일 곤경에 처하게 된다면 사회가, 나라가, 시스템이, 철학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가끔은 둥글둥글 한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모서리를 마주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시간들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2024년 현재.

2.

나는 빵돌이다. 빵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삼시세끼 빵을 먹어도 잘 살 수 있다. 한국인의 힘은 밥과 김치라 하고 멀리 해외에 나가 며칠을 지내다 보면 라면이 생각나기 마련이라는데 개인적으로는 꼭 그렇지 않았다. 군대에 가기 전, 사이좋은 대학동기들이 송별회를 해주겠다고 했던 때가 기억난다. 나는 술도 마시지 않고 구워먹는 고기도 좋아하지 않아서 친구들을 데리고 어느 술집에 가야할지 망설였다. 그 때 녀석들이 우리(10명 넘는 인원) 생각하지 말고 너 먹고 싶은 메뉴를 선택해라, 군대에 가는 건 너다. 라는 말을 해서 나는 주저없이,



'그럼 피자헛에 가자!'



라고 했다.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다수의 친구들은 약간 당혹스러워했다. 10명 넘는 대학생들이 한 저녁 대학로 피자헛에 모여(지금은 사라진 지점이다) 쭉쭉 늘어나는 치즈를 씹고 콜라 사이다로 건배하는 장면은 이색적이었고 가끔 그 때 찍은 사진들을 보면 과연 아이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아무튼 나는 그럴 정도로 빵이나 서양식을 좋아한다. 



유전의 영향도 있다고 본다. 어머니께서 빵을 좋아하신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할 때면 엄마는 치즈가 후하게 깔린 그라탕 같은 메뉴를 즐기셨다. 어려서부터 밥상에 슬라이스 체다 치즈를 놓으셨고 본가에 갈 때 마다 빵이 없는 풍경을 본적이 거의 없다. 덕분에 저밀도 콜레스테롤이 높으신데, 아니나 다를까 나도 고콜레스테롤 혈증을 갖고 있어 빵 섭취에 신경을 쓰는 중이다.



내가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에 빵집이 많았던 것은 축복이었다. 그것은 강렬한 유혹이기도 했다. 집집마다 얼마나 빵맛이 다른지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다. 프랜차이즈 빵집은 그런 면에서 재미가 없었다. 어느 지점에서 무슨 빵을 먹든 그 풍미가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동네를 채웠던 그 많은 개인빵집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슬프고 애잔한 기분이 든다. 10년 전에 쓴 1번 챕터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시대의 흐름이 동네 빵집의 생존에 얼마나 무정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강명 작가님의 단편 '현수동 빵집 삼국지'는 나같은 빵돌이에게 거의 동네 빵집에 대한 역사적 상징성이 곡진하게 담겨있는 논문같은 글인데, 특히 좋아하는 구절



"어머, 사장님 벌써 못 따라오시면 안 돼요. 빵 장사가 원래 잠을 못 자요."



같은 문장을 읽노라면 눈물마저 찔끔 맺히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글들을 볼 때면 시대의 변화가 야속하기도 하고 내게 일용할 빵을 제공했던 그 자영업자들의 노고들이 숭고하게 다가올 지경이다.




3.

오래된 글과 기억들을 다시 헤집어본 것은 최근 나의 옛동네 터줏대감 빵집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이 빵집은 P빵집이 생기기 전부터, 저 위에 언급한 라크렘이나 아해랑이 생기기 전부터, 그리고 아해랑이 있기 전에 있던 모나리자 빵집이 생기기 전부터 존재했던 명장의 집이다. 상호는 '또래명과'로 이름마저 아름다운 곳이었다. 실제로 빵집 안에 명장은 아니지만 기능장을 인증하는 여러 서류가 붙어 있기도 했다. 동네를 위해 여러가지 봉사를 하시는 흔적도 있었고, 가게도 꽤나 늦게까지 문을 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약 20년전 우리 가족이 이 동네로 처음 이사를 왔을 때부터 장사를 하고 있었고, 그 때도 이미 오래된 가게였다. 인터넷을 뒤져보면 인허가 년도가 1980년으로 나오는데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노포 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또래명과가 문을 닫았다. 꽈배기도 사먹고 바게뜨도 사먹고 스폴리아티네 글라사테(그냥 누네띠네)도 사먹고 아무튼 빵돌이 입장에서 여러 번 지갑을 열고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이용하던 곳이었다. 며칠 전 본가에 방문하면서 이 앞을 지나는데 그 또래명과의 간판도 내부도 텅텅 비어있는 것이,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던 빵이며 집기들이 전부 간데 없어 마음이 그만 쿵 하고 내려 앉았던 것이다.



오래 된 것은 결국 사라진다. 부모님이 살고 계신 이 동네는 아직도 대부분의 주택들이 80년대나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옛날의 자국들을 그대로 간직한 구역이다. 거주 연령층이 높아 적당한 저녁시간에만 가도 주변이 쥐죽은 듯 조용하다. 일찍 잠을 청하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겹고 아름다운 구석도 있다. 천편일률 적으로 새 것 냄새 나는 반듯한 풍경에 비해 제멋대로 뻗어있는 골목들이 뿜어내는 고유한 정취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동네에서 밤산책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이 동네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건물 하나가 없어지고 신축 빌라가 생기고 있다. 넓은 면적의 시장이 사라지고 아파트 단지와 쇼핑몰이 건설되고 있다. 오래된 가게들은 없어지고 다른 업종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모나리자 제과점과 아해랑 빵집이 있던 자리는 지금 부동산이 들어섰고, 라 크렘이 있던 자리는 프랜차이즈 치킨 집이 들어선지 오래다.



다른 이야기지만 이 동네에 피부과 명의로 전국적으로 손꼽히는(정말 인터넷을 검색하면 최고의 의사라고 검색되던) 여의사 분이 운영하시는 개인 병원도 있었는데, 80이 넘으신 이 여의사분이 최근에 숙환으로 별세하셨다는 동네 소식을 들었다. 나는 피부과 진료를 받으러 의원에 갔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병원 간판도 진료 항목을 적어놓은 창문 스티커도 그대로인 이 공간은 지금 미싱 공장이 되어 있다. 나는 이제 아름답다고 생각한 이 동네의 구석구석이 곧 사라질 것이라는 강한 예감에 휩싸였다. 이것은 모든 곳에서 익숙하게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슬프다.



이 곳에는 제멋을 지닌 아름다운 주택과 골목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 2분만 걸어가면 나오는 나무 숲에서는 최근까지도 나무를 쪼아대는 오색딱따구리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름모를 야생 설치류가 돌아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런 풍경들도 하나같이 없어질 것이다. 또래명과가 사라진 풍경 앞에 잠시 멈춰 섰을 때, 바로 길 건너 보이는 아파트 단지 공사장 크레인 타워의 모습은 마치 이 동네를 향해 천천히 진격하는 거대한 변화의 십자가 같았다. 과거에 큰 빵집이 작은 빵집을 몰아세운 것처럼 그 거대한 것들이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다 밀어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피라미드 구조인데, 기반을 구성하는 노동인력과 그들의 일터가 사라지면 다들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궁금하다. 작고 소외된 존재들과의 공생이나 협동이 사라지면 사회를 작동시키는 엔진이 파손될텐데 걱정이다.



라 크렘도 아해랑도 또래명과도 없는 이 마당에 대형프랜차이즈 P빵집은 아직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사실을 생각할 때면 무언가 기묘하고 소름돋는 기분이 든다. 또한 이런 와중에 옆 동네 어딘가에서는 효율이 없거나 가치가 낮은 경우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외치는 자가 득세를 하고 있으니 이제는 오색딱따구리마저 절멸할 일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정신이 아득할 뿐이다.



안녕, 또래명과.

폐점의 연유는 알 수 없지만 행복하고 즐거웠다. 옆옆 건물에 있던 배달 전문 돈까스 집에서 돈까스를 포장해 갈 때, 그 옆 건물에 있던 '영화마을'에서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책을 빌려볼 때, 또래명과는 항상 나를 유혹했고 꽤나 자주 나를 꾀어내는데 성공을 했다. 재개발이라는 이름의 유령이 십년 넘게 돌아다니고 있는 이 오래된 동네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동네 빵집 이었던 그 곳이, 보기만해도 어쩐지 든든한 기분이 들었던 명랑한 디자인의 간판이, 늦은 시간 가끔 서비스 빵 한 조각을 더 넣어주시며 키 작은 중생의 허기를 채워주셨던 주인장의 마음 씀씀이가, 오늘 따라 유독 아득하게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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