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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너 Aug 05. 2024

마땅한 식탁

시시콜콜한 이야기

캐나다에서 14일을 지냈다. 가족이 토론토 부근에 살고 있어서 아주 많은 도움을 받으며 머물렀다.

아메리카 대륙 자체가 처음인 올챙이에게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만 보아오던, 이른바 서양것에 대한 포뮬러를 체험하는 일은 몹시 즐거웠다. 



일주일쯤 지내다 보니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식탁의 중요성이다. 이 나라 혹은 이 문화권에서는 식탁이 소중함이 절실해 보였다. 



내가 머물렀던 온타리오와 퀘벡의 주택가에는 한국과 다른 한가함과 고요함이 있었다. 대개의 거주지역에 해당하는 땅이 넓고 인구밀도가 높지 않다는 것은 하루 이틀만 있어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는데, 이것이 사람들의 삶의 패턴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인지 밤이 되면 할 게 없다. 해가지면 딱히 갈 만한 곳도 갈 수 있는 곳도 즐길 수 있을만한 것도 없다.



한국은 도시, 특히 서울과 그 주변에 각종 분야의 인프라가 기형적으로 밀집되어 있고 인구밀도 역시 대단히 높은데다 땅까지 좁아서 집 밖을 나간다는 것, 집 밖에 나가서 무언가를 이용한다는 행위의 장벽이 낮은 사회다. 집집마다 거리가 있거나 무언가를 향유하려면 먼 거리를 나가야 하는 지역에 살아야 밤을 대하는 인식이 좀 달라질까. 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런 지역들이 대부분 소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웬만한 동시대 한국 시민들이라면 새벽에 나가서 마실 물을 사온다는 행위가 결코 까다로운 개념이 아닐 것이다.



캐나다는 그렇지 않다. 체류 기간동안 각기 다른 주의 세 개의 주택에 머물렀는데 예외없이 밤이 되면 할 게 없었다. 다운타운에 머물렀다면 좀 달랐을까. 하지만 어딘가에서 밤에도 할 게 있다는 것, 이용하고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24시간 존재한다는 것은 일반적이라기 보다는 특별한 개념으로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하루가 저물면 가장 많은 시간을 머물게 되는 곳이 거실 소파와 식탁 이었다. 체류 기간 동안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많았지만 글 마감을 하는 시간도 많았는데 자연스럽게 글 마감을 하러 식탁에 나와 앉곤 했다. 외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장 봐온 것으로 숙소에서 무언가를 해 먹거나 우버 배달을 이용할 때가 훨씬 많았고, 그럴 때 마다 자연스럽게 모든 구성원이 모이는 곳(이번 체류 동안 총 6명이 함께 지냈다)도 항상 식탁이었다. 해가지면 잠들기 전까지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시간 역시 식탁이다. 방에서 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조카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구성원들이 이민자 혹은 여행자 신분이기 때문에 즐길 수 있는 콘텐츠에도 한계가 있으며 실제로 즐길 수 있는 콘텐츠는 한국이 압도적으로 많았다고 느껴진다. 



밤이 되면 모든 것이 너무나 조용하고 모두가 집 안에서 구성원들과 시간을 보낸다. 한국에서 규모가 있는 도시의 주택은 그것이 연립주택이든 아파트든 창문 밖을 내다보면 불빛이 있고 걸어가면 편의점을 갈 수 있고 치킨을 사먹을 수 있다. 그것이 새벽 한 시여도 가능하다. 집집마다 밤 열시 열한시에 TV나 핸드폰으로 방송 프로그램, 유튜브를 시청하는 것도 일반적인 풍경이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한다는 행위의 응집력은 결코 강하지 않다. 캐나다에서는 반면 이 행위가 거의 당위적이라고 느껴진다.

나는 지난 2주 동안 홈(Home)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미국 영화를 보며 자라서 그랬을까 가족과 가정이라는 개념, 식탁에 둘러 앉아서 함께 교류하는 어떤 행위는 드라마의 맥락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심지어 아메리칸 뷰티나 시민 케인 같은 작품이라고 해도) 문화적 필연성 위에 놓여 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가족 식사 장면이나 외부인들이 문 앞으로 다가올 때 비고 모텐슨이 불안한 얼굴로 가족을 안고 있는 트랙-인 샷이 기억나는가? DVD 코멘터리에서 크로넨버그 감독이 그 장면을 좋아한다고 언급한 게 기억이 난다. ‘정말 불안해 보이지 않나요?’ 라고 반문하면서 말이다. 그들에게 가족과 식탁, 집의 현관이 가지는 테마는 이처럼 명료하다.



나는 별안간 식탁 장면들이 그리워진다. 내가 좋아하는 이안 감독의 <결혼 피로연>(리메이크 작을 기대 중이다)에서의 마지막 식탁 장면이나 같은 감독의 <음식남녀>에서의 아버지와 딸들의 식탁 장면, 혹은 P.J 호건의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디온 워윅의 I say little prayer를 가족들이 함께 부르는 식탁 장면들은 어떠한가(물론 레스토랑이지만). 하나같이 아름답지 않은가. 이 모든 미학의 전제는 ‘구성원들이 함께 밤에 모여 있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직장에 나갔던 이는 퇴근해서 Home에 돌아오는 것이고 가족들이 밤이 되면 밖에 나가거나 자기 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먹기 위해 잠을 자는 곳과 분리된 식탁이라는 곳에 나와 앉아야 하고 기왕이면 비슷한 시간에 서로들이 얼굴을 마주하는 행위가 가능한 개연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식탁 장면이 그리워지면서 동시에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그 풍경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고, 풍경의 상실이 그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한국은 점점 ‘통상적으로 밥을 먹는 시간에 노동하러 갔던 구성원이 집에 돌아오는’ 그림이 좀처럼 구성되기 어려워지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다양한 방식의 ‘애정관계로 묶인 구성원이 함께 밥을 먹는다는 개념’도 희석되고 있다. ‘밤이 되면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단 몇 분이라도 함께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하는게 가치 있고 밀도 높은 유희’라는 의식은 거의 신기루에 가까울 정도다.



밥먹는 곳과 일상을 보내는 곳의 분리가 되지 않는 사회, 함께 밥을 먹을 구성원이 없는 사회, 서로를 본다는 행위의 응집력 따위 없는 사회, 내 공간에서 내 화면을 보는 게 중요한 사회, 밖에 나가서 필요한 것을 얻고 배달을 시키는 편리와 효율이 명예처럼 공경시 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는 식탁의 존재론 따위 아무 의미없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캐나다의 식탁은 제법 충격적인 데가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 누구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의 주택가. 수십채의 콘도형 주택들이 밀집해 있지만 그들 모두가 식탁에 앉아 서로를 보는 시간이 보장되는 사회. 짧은 체류 기간 동안 겉핥기 식으로나마 보고 듣고 느꼈던 이 사회의 여러 장점과 단점들이 머릿속을 부유하는 가운데, 가장 강렬한 기억은 결국 식탁에 앉는 일의 마땅함에 대한 것이다. 더불어 산다는 개념의 가치를 망각하게 만드는 작동원리가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이토록 마땅한 식탁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은 대단히 요원해 보인다. 그래서 일까. 오랜만에 만나 각별했던 가족의 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식탁 풍경의 아름다움이 체류의 마지막 날 이토록 진하게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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