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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두진 Mar 11. 2021

하동 사람 이훈우

선영과 생가

2021 2 19 진주여고를 보고  이후 하동으로 향했다. 하동, 섬진강의 동쪽이라는 뜻이겠지.  너머는 구례다. 다리만 건너가면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하니 지리적 경계란 무시할 것이 아니다. 이훈우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그가 하동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이후부터 하동은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로  가고, 바빠서  가고, 게을러서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봄이 오는 길목에 페친인 엄명숙 선생을 통해 하동 야생차 박물관의 우화정 큐레이터와 연결이 되고,  분을 통해 이훈우의 족보  귀중한 정보를 알게 되면서 벼르던 남행 길에 올랐던 참이었다. 진주에서  분을 만나  선생의 소개로 진주여고 방문을 마쳤다. 하동으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설렜다. 수시로 일본의 김현경 선생, 뉴욕의 딜런  선생과 연락을 취하며 문자와 사진을 보냈다. 함께 오지 못한  분들의 아쉬움을 조금이나 달래보려 했다.


가장 먼저  보고 싶었던 곳은 이훈우의 선영. 경주 이씨 백사공파(이항복 후손)일가의 선영이 이곳 하동군 악양면 일대에  군데가 있는데,  중에서도 관심이  것은 이훈우의 부인 군위 방씨의 묘소였다. 족보에 이훈우의 묘소는 주소가 없었는데 부인의 묘소는 주소까지 나와 있었다. 함께 있을 확률이 놓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주소 마지막에 '참몬당'이라는 이름도 붙어있었다. 추정하기를, 아마도 묘소들을 한군데 모아놓은 장소를 가르키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 사당 비슷하게 생각했던 탓인데, 이것은 오류로 판명이 되었다. 이날  숙소에서 <악양면지> 읽다 보니 '창몬당'이라는 지명이 나온 것이다. '' 창고라는 뜻이고 몬당은 산기슭 정도의 의미였다. '' '' 오기로 판단된다. (이번에 보니 족보라는 것은 의외로 오류가 많은  같았다.) 그러니 사당과는 거리가 있었고 그냥 옛날에 창고가 있던 산기슭이었던 셈이다. 이날  김현경, 딜런   분과 페북 메신저로 문자를 주고 받았는데 부산 출신 딜런  선생 말이, '몬당' 원래 전라도 사투리인데 전라도에 가까운 경상도 지역에서도 쓰는  같다고 알려 주었다.

   

다시 낮으로 돌아와, 산자락을 여기저기 누비다 보니 속으로 실없는 웃음이 났다. 부모님이 모두 실향민인 나에게 선영이 있을리 없다. 그런데 이렇게 남의  선영을 뒤지고 다니다니, 이 무슨 황당한 일을 사서 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설레는 마음을 안고 악양면 정서리의 '참몬당/창몬당'선영 주소지로 찾아가 보니 아뿔싸, 그냥   공터였다. 하지만 지형이나 근처의 수목으로 보아 이전에 뭔가 묘소가 모여있던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후손들이 선영을 모두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한 결과였다. 그래도 이훈우의 다른 혈육들이 아닌 부인의 묘소 주소지를 추적한 것은 소득이 있었다.  지번의 현재 소유주라면 이훈우의 직계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아서 결국 폐쇄 등기부등본을 통해 그의 증손자가 현재 고양시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중한 편지를 하나 보내놓고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다. 제발 사진  장만이라도 구할  있다면...  


  전부터 추적해 오던 이훈우, 그 묘소 앞에 서면 온갖 기분이  들것 같았는데  허탈하게 되었다. 그래도 악양 읍내에서 사온 소주와 건포를 놓고 어쩌다 인연이 닿게  우리 업계의 대선배에게 절을 올렸다. 도대체 나는  이러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또 들었다. 숙연하기도 하고 솔직히  웃기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인연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나와 함께 절을 하고 있는 엄명숙 선생, 그리고  발치에서 우리를 촬영하고 있던 우화정 선생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이훈우는  아름다운 곳에서 태어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이 겹겹이 높기만 한데  간격이 넓어서  사이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봄기운이 살랑거리고 늦은 오후의 햇살은 감미로웠다. 내가 날려 놓은 드론의 모터 소리가 유일하게  나른한 정적을 깨고 있었다.  

(촬영: 우화정)

선영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입석리의 생가로 향했다. 원래 생각은 그냥 밖에서만 보려는 것이었는데 문패를 보니 이씨여서 혹시 후손이?라는 생각에 염치 불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분이 나오셨는데 말씀을 여쭈니 자기들은 경주 이씨가 아니라고. 역시 실패한 셈이었지만, 주변을 살펴보니 제법 누마루가 달린 사랑채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들이 오기 전부터 있던 집이고 백년이 훨씬 넘었다고 한다. 안채도 자기들이 수리했지만, 그 내부는 그냥 한옥 골격이 남아 있다고 했다. 혹시 한국 최초 근대 건축가의 생가? 이렇게 생각하니 선영에서의 아쉬움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이훈우의 생애가   밝혀지고 그가 정말 우리 사회의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될만한다는 것이 인정되면, 가로 추정되는 이 집은 실로 귀중한 흔적이 아닐  없다.

해가 뉘엇뉘엇  때쯤 하동읍내를 돌면서 이훈우의  이은우가 운영했던 남일물산 , 이은우의 읍내 주소지 등을 둘어보고 마지막으로 혹시 이훈우가 설계한 건물이 아닐까라고 생각해왔던 하동 항일청년회관보전회(하동 청년회관) 건물까지 찾아갔다. 1927 무렵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은 건물의 건립과정에이은우가 참여하였다. 당시 이훈우가 일신여고보를 설계할 무렵이라 어느 정도 그가 설계했을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훈우야,   학교도 하나 설계하게 되었으니  정도는 써비스로...'?) 하지만 건물이 변형되었고 이렇다할 물증은 찾기 어렵다고 생각되어, 이것으로 하동 답사의 공식 일정은 마치게 되었다. , ,   사람은 읍내의 식당에 가서 신나게 고기를 구워먹음으로써 기운도 차리고   깊은 날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날 숙소에서 진주여고와 관련된 이런저런 기록을 들여다 보며 하동의 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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