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태우고 가주오
배경사진 출처 : 서울독립영화제(SIFF)
★★★★
사람은 또 사람을 통해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개인적으로 하루키의 책을 읽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상실의 시대, 1Q84 등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 작가이지만 이상하게도 손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원작에 비해 영화가 어땠다, 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배우 겸 연극 감독인 가후쿠 유스케(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우연히 아내 가후쿠 오토(키리시마 레이카)의 외도를 알게 된다. 어느 날 오토와의 관계를 혼자 속으로 고민하던 유스케에게 오토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중요한 대화를 앞두고 있다는 본능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유스케가 만난 것은, 이야기를 꺼내는 아내가 아닌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진 아내의 모습이었다.
이후 2년의 시간이 흐르고 유스케가 또 다른 연극제의 무대를 준비하며 전속 운전 기사인 와타리 미사키(미우라 토코)와 아내의 외도 상대였던 연극 배우 다카쓰키 고지(오카다 마사키)를 만나게 된다. 결국 유스케와 미사키의 관계를 비롯하여 타인을 위로하고 이해하며 상실과 고통을 이겨내고 그렇게 살아가자고 하는 이야기다.
사람 인(人)의 한자는 두 명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이다. 오롯이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닌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것, 그게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기승전결을 부여해서 3시간 짜리 영화로 만들면 ‘드라이브 마이 카’가 될 것 같다.
‘차’는 극 중에서 매우 중요한 공간이자 물건이다. 유스케는 차에서 오토의 목소리와 함께 대본의 합을 맞춘다. 잘 정비된 올드카의 모습에서 주인의 애정과 애착을 볼 수 있다. 오토의 목소리와 함께 대본의 합을 맞추는 중요한 리추얼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미사키에게 운전대를 주지 않으려했다. 그녀는 어릴 적 맞지 않기 위해 중학교 때부터 어머니를 조용히 태워다니며 운전을 익혔다. 그녀에게 차는 어머니라는 애증의 대상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이자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되었다. 영화의 초반에 그는 주로 차를 몰고 오토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거나 오토를 조수석에 태우고 이동한다. 이와 반대로 그녀는 그의 운전 기사이자 길잡이가 되어준다. 특히 그를 태운 차를 몰고 밝은 햇빛이 쬐는 곳으로 이동하는 구도는 이후 둘의 관계를 미리 보여주는 듯 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깊은 고민에 쌓인 그는 그녀의 어릴 적 장소로 가달라는 요청을 하고 그녀는 밤낮으로 운전하여 그녀가 어머니를 ‘죽인’ 장소에 도착한다. 운전자 교체를 제안하는 그에게 하루 안자는 것 정도는 괜찮다며 끝까지 운전대를 붙잡는 그녀의 담담한 모습은 퍽 강인해보였다. 뒷 좌석에서 처음으로 조수석에 앉은 그에게도 기댈 곳이 생긴 것 같아 보였다.
오토의 외도로 받은 상처로 인해 평소보다 집에 늦게 도착한 유스케는 일찍 도착했더라면 아내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자책감에 자신은 아내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미사키는 산사태로 무너진 집에서 탈출한 후 일찍 신고했다면 어머니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다고 생각한다. 비록 잦은 외도를 하는 아내와 폭력적인 학대를 일삼던 어머니였지만 그들에게는 긴 시간이 흘러도 놓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무던해졌다고 착각할 정도로 깊이 응어리진 서로의 상처를 알게 된 둘은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진심어린 위로를 건넨다.
지금까지 본 일본의 실사 영화나 드라마 중 재밌다고 생각한 것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특유의 오글거리고 과장된 연기에 힘들어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통해 재밌게 본 일본 작품이 두 개로 늘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일본 특유의 눈을 통해 나타내는 감성이 묻어나는 것도 좋았다. 다소 간에 일본 작품을 향한 선입견이 조금씩은 해소되고 있는 것 같다.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은 꽤나 길게 다가왔고 영화를 시작하는 자체를 힘들게 만들었다. 집에서 영화를 볼 때면 한 편을 보더라도 어찌나 끊어서 보게 되는지, 잔잔하게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 가는 이 영화를 제대로 못 즐긴 것 같아 아쉽다. 영화관에서 봤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작년에 영화관에서 ‘헤어질 결심’을 무척 재밌게 봤는데, 영화관에서 봤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헤어질 결심’도 집에서 봤더라면 그만큼의 감동과 몰입을 느낄 수 없었을 것 같다. 초견이라는 소중한 경험의 몰입도를 위해 이런 영화들일수록 영화관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블록버스터 혹은 사운드가 웅장한 영화가 아니면 집과 차이가 없다 생각했는데, 외려 그런 영화들 보다 몰입을 통해 얼만큼 그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느냐가 더욱 소중한 가치였다는 걸 근래들어 생각하게 된다.
2023.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