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아주 역사가 깊은 베이커리 집을 본 적이 있다. 뉴욕시에 있는 100년이 넘은 '베니 에로'라는 베이커리 집이다. 이탈리아 분이 미국으로 건너와 작은 캔디 가게를 시작으로 지금은 미국의 3대 유명한 케이크 집이라고 한다. 여기 사장님은 4대째 대를 이어 영업하고 있다. 여기에 오는 분들은 정말 다양한 나라에서 오는데 역사가 깊은 만큼 손님들도 대를 이어서 오고 있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 가게도 나이가 들고 추억과 이야기가 쌓이고 그 속에 녹아든 손님들의 시간이 이곳을 더 빛나게 해주는 것 같다.
빵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깊다. 태초의 빵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인지 계획하에 이뤄진 실험인지 알수 없지만 곡물가루에 물을 섞어 난이나 토르티야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스트를 넣어 부풀어 오른 빵은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이 되었는데 이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아서 정확하게 밝혀진 건 아니다.
그 후 5세기 아테네와 로마에선 빵 가게에서 빵을 살 수 있었고 중세 유럽에서부터 빵이 주식으로 올라왔다. 원래 하얀 빵은 부자들이 좋아하는 빵이었고 전체 곡물을 사용하여 만든 검은 빵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다. 20세기 후반쯤 전곡의 빵이 영양학적으로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럼 이 빵이 동양에는 어떤 경로로 들어오게 되었을까?
유럽에서 발달한 빵은 16세기 초반 이미 타이완을 점령했던 포르투갈의 무역선을 통해 포교 활동에 열중하던 가톨릭 신부들이 중국과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카스텔라가 전해진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대만 카스텔라 일본 나가사키 카스텔라가 유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한국의 빵의 역사가 궁금해진다.
최초의 빵을 맛본 조선인은 1720년 이이명(좌의정)이라는 자가 연 행사로 베이징에 갈 때 아들을 데리고 갔는데 이기지(숙종 16~경종 2 조선 후기 학자)가 바로 그중 한 사람이다. 베이징의 가톨릭 성당에서 '서양 떡'을 먹어본 경험을 자신의 언행록인 일암(이 기지의 호) 연기에 기록해 두었다.
이기지가 맛본 '서양 떡'에 사탕, 계란, 밀가루가 들어갔다고 하니 아마도 카스텔라를 이야기하는듯하다. 그 맛은 부드럽고 달았으며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았으니 참으로 기이한 맛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다른 이가 만들기를 시도하였으나 자세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실패한 것으로 예상이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환경과 기후 때문에 밀 재배가 어렵다. 재배되는 밀도 글루텐 형성이 잘 안 되는 밀이어서 아마도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은 자신들만의 방법을 찾아내서 카스텔라를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확산이 되기 시작했는데 일본이 산미 증식 계획으로 조선의 질 좋은 쌀을 군산과 목포를 통해 약탈해 갔다. 먹을 것이 부족했었던 조선인들은 대체품이 필요했고 밀가루의 사용이 늘어나게 되면서 제분공장도 늘고 빵도 함께 확산이 되었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가 숨어있다. 이때를 계기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빵의 역사도 진화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주식으로 먹는 쌀만큼이나 우리에게는 중요한 먹거리가 되었다. 맛이 있는 만큼 건강에는 해롭다는 슬픈 진실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빵을 만드는 입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좋은 재료로 최대한 건강하게 즐길 수 있는 빵을 만들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