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전용 전시회를 다녀오며.
가끔 멜번 시티를 나가면 미술관을 들른다.(NGV-National Gallery of Victoria) 아니, 이번에는 특별히 초대를 받아 일부러 시티를 나간 거다. 미국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한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거는 만큼 인기가 대단해서 지난 몇 달간 인파가 미어터졌을 전시였다. 미술관은 회원들만 입장할 수 있는 특별 전시가 월요일 저녁에 있다고 넌지시 알려왔다. 오호, 올해 마침 회원이 되었더니 이런 특전이 있구나! 좋아라 하며 정보를 찾아보니 보통 입장료에 오히려 추가로 몇 달러가 더 붙어 있었다. 그럼 그렇지! 가격에서도 특혜를 기대하다가 허탈해졌지만, 좀 조용히 그림을 보고 싶기도 했고 도대체 뭐가 다를까 궁금하기도 해서 남편과 온라인으로 표를 구매했다.
시티는 교통이 붐비기도 하고 주차도 번잡해서 집에서 한 시간쯤 운전한 뒤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H역에 무료 주차를 하고 기차로 시내를 가는 것이 우리의 루틴이었다. 그런데 H역에 도착해 보니 대공사를 하느라 기차 서비스는 중단됐고 대신 셔틀버스가 끊어진 구간을 오가며 승객들을 태우고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라 당황했지만 다행히 여유 있게 나와 시간이 촉박하지는 않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간만에 버스를 타고 좀 돌아서 가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버스 기사는 머리에 터번을 두른 시크족이었고 정류장이며 버스에 탄 거의 모든 이들이 중동 아프리카 인도 등등에서 온 이민자여서 놀랐다. 버스로 도는 정류장과 주변 상점들 거리 풍경마저도 낯설 만큼 이국적이었다. 나도 이민자지만 이민자들이 정말 다양하고 더 많아진 건가.. 내가 시골에 살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멜번도 많이 변했구나 싶기도 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인도계 이민자의 수가 중국계를 앞지르기 시작했고 요즘 멜번에선 이민 정책을 반대하는 과격 시위도 종종 벌어지는지라 갑자기 주변 풍경들이 좀 생경하게 다가왔다.
시간이 없어 미술관 근처의 회전초밥 집에 이른 저녁을 간단히 먹으러 갔다. 늘 긴 줄을 서는 장사 잘되는 집이었는데 가게 사이즈가 반으로 줄어 있었고 회전 테이블은 사라졌다. 서비스를 더해봐야 수익이 더 나는 것도 아니고 임대료는 비싸고 종업원 구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우니 그냥 사들고 나가서 알아서 먹으라는 건가 추측해 본다. 장사는 여전히 잘되는 듯하는데, 맛이 평범해졌다. 단골이라 하기도 뭐 하지만 그래도 한 번씩은 왔는데, 오늘이 마지막 일 듯하다.
소상공인들은 일할 사람을 못 구해 영업을 제대로 못하는데, 일부이긴 하지만 목소리를 높이는 한쪽에선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뺐고 집값을 올린다고 불평이니 참 세상은 시끄럽다.
미술관 주변엔 입장을 기다리는 듯한 이들이 앉아있었다. 5시에 문을 닫은 미술관이 잠시 실내를 정돈하고 30분 뒤 저녁 입장객을 다시 받을 것이다. 잠시 말라위 생각이 났다. 사람들이 거리며 집 앞이며 교회며 땅바닥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는 모습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라고 여겼는데, 생각해 보니 세상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이렇게 모여 앉아 두런두런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거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단지 개발된 도시는 근처에 카페도 있고 앉을 의자나 공원도 있으니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지 않을 뿐.
확실히 줄이 짧았다. 너무 조용하지도 붐비지도 않는 적당한 규모의 사람들이 모였고 그림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애호가든 문외한이든 누구라도 좋아할 만한 그림이 인상파의 작품들 아닐까. 미술책에서 많이 본 유명작부터 좀 새로운 작품까지 아름다운 전시가 방마다 이어졌다. 그런데 말라위 여행의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인지 브런치에서 여행기를 적는 중이라 그런 건지 보는 그림마다 엉뚱하게도 아프리카의 말라위와 자꾸만 연결이 되는 것이었다.
가령, 모네의 '숲 속의 나뭇꾼'을 보면 말라위에서 나무 가지를 잔뜩 등에 지고 내려와 땔감으로 팔던 빈곤한 노동자가 떠오르는 식이었다. 프랑스 시골에서도 장작을 패서 등짐을 지고 내려와 살았구나. 1-2백 년 전에는...
강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그림을 보면 말라위 냇가에서 빨래하던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똑같은 앵글로 사진도 찍었었는데... 그림을 보는 건지 내 추억을 씹는 건지 내가 감상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건지 내 상태를 정의하기가 어려웠지만 다른 관람객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림 사이를 걷는 시간들이 좋았다.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깜짝 놀래키고 싶다.' 세잔이 이런 말도 했구나. 사과 하나로 역사를 바꾼 이가 아이작 뉴튼, 스티브 잡스 말고도 또 있었구나. 빛의 흐름으로 사물을 표현하고 공간을 구현한다는 것이 당시에는 정말 혁명적인 발상이었고 파리는 발칵 뒤집어졌을게다. 나도 사과로 뭘 좀 해볼까?
방마다 각기 다른 색상의 벽지와 가구 조명이 있어 파리의 여느 전시장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 방의 하이라이트 작품은 르느와르의 것이었다. 자주색 페인트, 찬란한 샹들리에, 무도회장에 들어선 듯한 느낌, 가벼운 음악에 취해 빙글빙글 돌고 싶은 기분이다. 그래, 세상만사 복잡해도 잠깐씩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미소 짓다 보면 인생은 그런대로 살만할 게다.
'수련은 끊임없이 변한다. 계절을 따라 피고 지는 게 아니라 매 분마다 다른 모습이다. 수련은 대단히 장관을 이루는 것이 아닌 그냥 옆에 있는 꽃이기 때문이다.' 모네의 말처럼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인생이지만 내 앞에 있는 자잘한 꽃들을 잔잔이 뜯어보며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듯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세상을 보면 순수하고 부드럽게 달콤한, 조금은 하얗고 푸르고 핑크빛이기도 한 동화 속의 어느 시간에 들어서 있지 않을까..
화가들의 멋진 그림과 명언을 감상하고 나오니 어둑한 밤이다. 따뜻한 어두움과 점점의 빛이 어우러진 멜번의 밤은 오늘도 아름답다. 이제 집에 가서 갚은 잠을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