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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르미 Sep 02. 2021

초3 딸과 계약서를 썼다

아리스토텔레스(가정교사)가 되기로 했다. 내 딸은 알렉산더가 아니지만

  초3.


  이제 영어 공교육이 시작되었고, 코로나로 거의 날리긴 했지만 1학기를 보내 본 저희 부부의 마음은 복잡했습니다. '라떼는 말이야~ 스스로 열심히 했지 말이야~ 초등학교 때는 좀 놀아도 되지 말이야.'라고 하기엔 초등학생들의 기본적인 학업 성취도나 선행 학습 정도가 상상 이상으로 높아졌더군요.


  이제야 학원을 보내봤자 (학원비 낼 돈도 없지만) 좋은 학원은 레벨 테스트를 봐야 들어간다니, 선행 학습을 위한 선행 학습(?)을 해야 할 지경입니다. 그래도 내가 의식 있는(이라고 쓰고 가난하다고 읽는ㅠ) 대한민국 평균 학부모로서 그렇게는 못하지요. 고롬.


  그래서 집에서 딸의 학업을 도울 방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단 하고 있는 온라인 학습지는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그냥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따님 본인 의지도 있고, 사실은 얼마 전에 바꿨기 때문에 지금 취소하면 어마어마한 위약금(ㅠ)을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교육은 부모의 재력에 따라 자녀의 학업 성취도가 결정되는 시스템이라는 게 말로만 들었었는데 3학년이 되니 실감이 확 나버렸네요. 물론 저희 부부는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아이의 장래에 부모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밖에 없고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계속 살 거니까요. 이민도 돈이 있어야... 퍽.


  돈돈 했지만, 사실 돈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빠는 돈이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우... 아니 한국 입시 교육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현자가 되기 위해 입시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수능 세대라 사실 수능만 잘 봐도 대학을 갔었는데, 지금은 아니더군요. 넋 놓고 있다가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되기 딱 좋은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딸과 계약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뭔가 교사에게 불리한 노예계약 같지만... 딸이니 봐주도록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박○○과 아빠의 학습 계약서     


1. 박○○이 아빠와 하루 30분 이상 학습을 성실히 하면 아빠는 스티커 1장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용돈 1000원을 제공한다. 매일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해당하는 날짜에만 스티커를 붙일 수 있다. 아빠는 매주 일요일에 다음 주(월~일) 칭찬 종이를 박○○에게 준다.


2. 학습은 30분을 살짝 넘을 수는 있지만, 35분을 넘지 않는다. 35분을 넘기면 박○○은 도망가도 된다.


3. 스티커(7장)를 모두 모으면 박○○은 ‘아빠 엄마와 함께 하는 보드 게임 1시간권’을 얻는다. 다음 주중에 아빠 엄마는 반드시 시간을 내어 해야 한다.


4. 주 7회 이상 학습을 할 경우 BONUS 스티커를 제공한다. BONUS는 다음 중 고를 수 있다. 1)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용돈 2000원 2) 아빠와 학습 하루 면제권 (면제권을 사용할 경우 스티커는 받을 수 있고 그날 용돈은 받을 수 없다.)


5. 7회 이상 학습을 해서 스티커를 붙인 칭찬 종이를 4장 모으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용돈 5000원을 추가로 제공한다.


6. 박○○은 아빠를 선생님으로 생각하고 존경한다. 아빠는 박○○을 학생으로 대하고 존중한다.


7. 월 – 영어 / 화 – 수학 / 수 – 독서 논술 / 목 – 영어 / 금 – 수학 / 토일 – 복습 및 보충     


위의 내용에 동의하며 성실하게 학습에 임할 것을 약속합니다.




  사고 싶은 것들은 슬슬 생기고 있으나 아직 용돈의 자유(?)를 얻지 못해 전부 통장에 차곡차곡 모으고 있던 딸에게는 좋은 소식입니다. 슬슬 금융과 자산 관리에 대해 경험시켜줘야겠다 싶었는데 용돈 줄 핑계로도 안성맞춤이고요. 공부하는데 아빠가 옆에 있어 주고 칭찬도 해주니 잘 되기만 하면 '사춘기야 떠나가랏!'입니다.


  아내는 보면서 쓴웃음을 짓긴 했지만, 내심 좋아하는 눈치입니다. 원래 남(편)이 해주는 밥이 맛있고, 남(편)이 성질부리지 않고 애 공부 가르쳐 주면 엄마 얼굴에 웃음꽃이 핍니다. 이제 3일째 즐거운 공부 시간인데 아직까지는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영어는 읽기와 쓰기, 국어는 독서 논술, 수학은 학교 공부 복습과 약간의 선행(?) 정도로 목표를 잡았습니다. 입시 교육에 절어 있다가 수능을 주르륵 미끄러져서 논술로 공대를 갔던(응?) 아빠도 충분히 가르칠 수 있을만한 커리큘럼입니다. 아직까지는. 호호.

<나름 만화책으로 다져진... 느낌으로 때려 맞추는 어휘 솜씨 자랑 중. 모르는 단어라는데 다 맞춘다. 대박.>

  저는 딸의 행복을 위해 무기한 노예 계약을 맺은 가정교사가 되기로 했습니다. 공부도 가르쳐 주고, 칭찬도 해주고, 용돈도 주고, 그게 하물며 아빠라니욧!! 사랑하는 딸아, 내가 더 이상 너를 가르칠 수 없게 되는 날이 속히 오게 되기를. 청출어람이라고 한단다. 그때는 용돈을 두 배로 올려주마. 호호.


  P.S. 여보, 내 용돈은 좀 어떻게 안 되겠니?ㅠㅠ 어제 천 원짜리가 없어서 임시로 만원을 줬더니 오늘 엄마가 낼름 천 원짜리랑 바꿔갔다지 뭡니까. 엉엉엉. 우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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