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똑깨똑. 대학원 동기인 형님이 단톡방에 메시지를 올렸어요. 시골에 아는 분이 흑염소를 하는데 기똥차게(?) 좋다고 필요한 사람 있으면 말하라고. 이제 몇 년 후면 들이닥칠 반갑지 않은 손님, 갱년기를 대비해 아내에게 뭘 좀 먹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반가운 깨똑이라 덥석 물었어요. 그렇게 흑염소 한 마리가 검고 쓴 물 이백 봉지가 되어(?) 저희 집으로 오게 되었어요.
여기도 흑염소 저기도 흑염소
흑염소가 판친다아~ 이히~ 우르르릌~ 하~
"여자가 사십 전에 흑염소를 세 번 먹으면 갱년기를 수월하게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고 해요. 아닌가? 저 당한 건가요? 힝. 이 글은 아내를 끔찍이 생각하는 기특한 남편(?)의 SNS식 자기 자랑이 아니에요. 오히려 뭘 몰랐던 한 인간의 자아비판(?)에 가까워요. 그리고 결혼 초에 정말 사랑할 줄 몰랐던 과거의 저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글이에요.
이전에 저는 돈을 기준으로 살았어요. 돈에 삶을 맞추면 혼자 살 때는 사실 문제가 별로 없어요. 알뜰하다고 칭찬도 들어요. 없으면 안 쓰고, 차비 없으면 걸어 다니고, 적게 벌면 적게 먹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많이 벌 생각도 안 했어요. 저는 형이상학적으로 돈에 자유한 고차원적 인간이라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정을 이루고 나면 달라져요.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한 사람이 돈에 과도하게 자유하면, 다른 가족들이 다 돈에 매여요. 돈에 자유해서 내가 풍풍 쓰고 살면 다른 사람은 그걸 따라가느라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요. 내가 돈에 자유해서 심하게 근검절약하면 다른 사람은 꼭 써야 할 돈도 못 쓰고 벌벌 떨며 눈치를 봐요.
수입이 넉넉한 분들이나, 돈에 대한 생각이나 소비 패턴이 비슷한 부부는 아마 이해하지 못하실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아직 결혼 전이시라면, 과도하게 절약하는 사람과 결혼하기 전에 꼭 생각해 보세요. 내 기준에서는 적절한 소비가 그 사람 기준에서는 과소비로 보일 수 있어요. 그러면 고조 옴팡 뒤집어쓰는 기라요.
저희 집 첫째는 허니문 베이비예요. 10년 전, 신혼이고 뭐고 없이 결혼하자마자 저는 직장에서 인생 최고의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고, 아내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동네에 덩그러니 떨어져 임신 기간을 보냈어요.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5개월 동안 매일 만나는 불 같은 사랑으로(?) 결혼을 한 터라, 저희는 사실 서로 잘 몰랐고 별로 친하지도(!) 않았어요.
출산이 임박했을 때 아마 250만 원쯤 되었던 조리원 비용으로 사달이 났어요. 그 당시 저희 집 한 달 수입은 270만 원이었고, 막 이사한 터라 모아둔 돈도 없었어요. 결혼에 이사에 모두 양가에서 보태주셨기에 또다시 손을 벌리기도 뭐했고요.
돈을 기준으로 살았던 저는 조리원 4주냐 2주냐 했을 때 당연히 2주였고, 그마저도 부담이었어요. 신용카드도 거의 쓰지 않고 살았기에 대출 이런 건 알지도 못했고요(지금은 잘 알아요 호호호). '돈이 없으니 안 쓰고 못 쓴다. 누가 주면 고맙지만 달라고 할 수는 없다.'가 제 인생 모토였어요. 누구보다 똑똑하고 알뜰했지만 사실은 세상 멍청이였어요.
그렇게 돈을 기준으로 살 때, 아무런 악의 없이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회복 불가능한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답니다. 결국 어찌어찌 조리원에 2주 정도 들어가긴 했지만, 여전히 월화수목금금금이었던 저는 아내와 아이와 함께 있기도 어려웠고, 또 지출이 커지니 더 부담이 되어 일만 열심히 했어요. 우리는 그 일로 오랫동안 아팠어요.
'뭘 몰라서 그러니까 이해해.'라고 하기에는 진짜 몰라도 너무 모르고, 달라도 너무 달라요.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데, 사랑할 줄 몰라요. 10년 전의 저는 그랬어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저는 이게 돈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게 돈 문제지만 사실은 돈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지는 몇 년 안돼요. 그렇게 힘들면서 배워갔어요.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세상에는 있어요. 마음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위해 내 마음을 쓰는 것이 돈보다 더 중요해요.
부부의 기준은 사랑이었어요. 사랑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알아봐야 하고, 그러기 위해 미리 대비하고 소비 계획을 짜야해요. 상처나 부담이 되지 않도록 주의 깊고 따뜻하게 대화해야 해요. 그러려면 무엇보다 시간이 있어야 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둘째 때는 제가 조리원 투어를 계획했어요. 호텔 같은 곳들을 둘러본 후 아내는 너무 비싸서 안 되겠다고 가장 싼 데로 예약을 했어요. 저랑 살아온 시간을 통해 아내에게 구김살이 생긴 것 같아서 미안했어요. 그래서 첫째와 같이 지낼 수 있는 그보다 조금 좋은 곳으로 바꿨어요. 돈은 여전히 없지만 이 남자는 생존의 방법을 터득...이 아니고 사랑을 어떻게 하는 건지 조금 배우게 되었어요.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10년 전의 저 같은 똥멍청이는 없으시겠지만, 혹시라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서로에게 마음을 쓰지 못하고 계시다면 부족한 글이 조그만 위로라도 되시기를 바래요. '돈이 없지 가오가 없나.'는 말은 '돈이 없다고 마음도 없으면 쓰나.'와 맥이 통해요. 사랑하면 마음을 써야 하고 마음을 쓰다 보면 돈도 써야겠지만, 대책 없는 삶이 적어도 사랑 없는 삶보다 훨씬 나아요.
이것이 없는 살림에 흑염소가 저희 집에 오게 된 경위입니다. 이제는 돈이 없어도 마음을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때마침 국민지원금이 나왔네요. 어머나 세상에. 역시 일단 지르고 볼 일이에요. 호호호?
부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저 때문에, 돈 때문에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기를 기도하며 오늘도 생글생글 웃으며 아내에게 쓰디쓴 약을 먹입니다. 호호호. 이제 한번 먹었으니 두 번 남았어요 여보.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