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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르미 Aug 27. 2021

나는 복수의 화신과 결혼했다

"복수할 때에는 무덤을 두 개 파 놓고 하라."

  "복수할 때에는 무덤을 두 개 파 놓고 하라."라는 일본 속담이 있습니다. 복수의 연쇄는 한번 시작되면 답이 없습니다. 누군가 한쪽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한쪽이 죽는다 해도 그의 제자나 자식이 훗날 찾아와서 "스승님(부모님)의 원수! 받아랏!"하는 대사는 무협 영화의 클리셰입니다.


  결혼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아군일 때에는 괜찮지만, 시댁과 처가와의 관계, 세계관과 재정관, 라이프 스타일, 갈등 해결 방법, 의사소통 방식 등 여러 산적한 문제들을 헤쳐 나가다 보면 마음에 하나씩 스크래치가 생겨납니다. 그 사이에 주고받는 말들이 나에게는 괜찮은 말인데 너에게는 안 괜찮은 말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가 힘들 때 그렇게 객관적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지난번 내가 그렇게 할 때는 이렇게 말하더니 왜 너는 그렇게 해?"

  "아유. 치사하다 치사해. 그걸 기억하고 있냐?"

  "억울해서 그래. 화를 낼 수는 있지만, 공평하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니야?"

  "그래 너 잘났다. 어디 제대로 따져볼까? 3년 전에..."

 

  그렇게 복수의 화신이 되어 서로 한 방 칠 기회를 노리면서 살아가는 시절도 올 수 있습니다. 참 복잡한 세상. 웰컴 투 부부의 세계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좋겠지만, 만약 종종 서로 크고 작은 복수를 하고 있다면,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람 속에는 자기가 옳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틀렸다."는 식으로 지적질을 하면 즐겁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드뭅니다.


  회사에 가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내 잘못 아닌데요."를 주장하기 위해 영혼을 갈아 넣으며 자기를 변호하는 것 자체가 업무인 사람도 종종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거짓말은 귀여운 수준입니다. "나는 원래 잘못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했을 리가 없다."는 둥의 논리를 펼치며 우주방어를 합니다.


  "내 잘못이 없다."는 명제에 지배당하는 인간은 심하면 현실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진짜 그렇게 믿습니다.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이나 대화를 기억에서 삭제합니다. 그래서 잘못하고도 스스로 억울해합니다. 그렇게 사람은 스스로의 "옳음"을 포기하지 않을수록 필연적으로 억울하고 고립된 인생을 살아갑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게 사람을 미치게 만듭니다. 서로의 옳음이 다르고 그 기준이 다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기억과 현실을 적절히 주관화시킵니다.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갖고 불편할 때마다 서로에게 들이대니, 온전히 싸워도 힘든 그 싸움이 제대로 될 리 없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싸우든, 속으로 싸우든 정나미는 하한가 폭락장입니다.


  흔히 '구김살'이라고 표현합니다만, 살아오면서 당하고 빼앗긴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비교적 더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지켜야 했으니까요. 마치 약한 동물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무서운 동물을 흉내 내거나 자기 몸을 크게 하는 것과 같은 반응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회사에도 있지만, 만약 집에서 이런 존재적 충돌이 생기기 시작하면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회사야 퇴근하고 집에 오면 그나마 안 볼 수 있지만, 집에는 안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나미가 떨어진 상태에서 생활을 같이 해야 하다 보니, 우리 안에 있는 복수의 화신들이 좋아라 날뛰기 시작합니다. 회사에서야 자기 일만 잘하면 그래도 책잡힐 일이 덜하지만, 생활공간에서는 얼마든지 약점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누가 너의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고, 누가 잘못하거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합니다. (결론적으로는 그게 서로에게 이익이라는 뜻이겠지요.) 악마는 "누가 너의 뺨을 한 대 때리거든 너는 그자의 뺨을 77대 때려서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하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복수를 긍정하는 입장이 있고, 복수를 부정하고 경계하는 입장이 있습니다. 적에 대한 복수야 그렇게 두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겠으나, 같은 편. 그것도 가족에게 계속해서 복수하는 삶이 행복할 리 없습니다.  



  전에 "여행 마지막 날에 사는 악마를 조심하세요."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이럴 때 우리 속에 있는 작은 악마, 이른바 "복수의 화신"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복수의 화신은 우리를 잘 속입니다. 유베날리스라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복수는 삶 그 자체보다 더 달콤하다.'...라고 바보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이나 관계에 대해 심도 있는 공부를 하고 부부가 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하지 말고, 몰랐으면 새롭게 알거나 배우면 됩니다. 때로는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남이었던 사람이 부부가 된다고 해서 다 이해가 되면 그게 비정상이지요.


  저는 오랫동안 유베날리스가 말하는 '바보들'로 살아왔습니다. 맞은 것만 세어 보며 때린 것은 기억에서 지웠습니다. 맞았으니 때려도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이라도 지킨다면 법적으로야 공평하다고 하겠으나, 그것도 현실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눈을 빼갔는데 어떻게 눈만 빼요. 이자를 받아야죠. 열 받아 있을 때는 건드리기만 해도 원펀치 쓰리 강냉이는 기본입니다.


  복수를 일삼으며 살던 나날 끝에 아내가 먼저 죽었습니다. 저는 제가 먼저 죽었다고 주장하곤 하지만, 그것은 주관적인 저의 의견에 불과하고, 누가 먼저 죽었는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아내는 저에게 제가 원하는 '옳음'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옳음'을 선물하는 선한 복수를 시작했습니다.


  두 개 판 무덤에 둘 다 들어갔지요. 그리고 복수를 묻어 버리고 나왔습니다.



  우리 형편에 맞지도 않는 드롱X 커피머신을 아내에게 선물했던 것은 그런 이유였습니다. 저는 이제 압니다. 돈 40만 원은 알바라도 해서 벌면 그만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한 고통은 저에게 그 돈 이상의 피해를 줍니다. 그동안에는 복수의 화신에게 속으며 살았지만, 이제는 상대방이 원하는 '옳음'을 주고, 저는 저의 '옳음'을 실천하면서 삽니다.


  물론 남편으로, 아버지로, 인간으로서도 아직 멀었지요. 그러나 매일 복수하며 살 때보다는 훨씬 행복합니다. 그래서 이제 아침을 짓고 빨래를 개러 갑니다. 글이 길어져서 약간 늦었네요. 서둘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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