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법(觀心法).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나온 궁예의 명대사(?)에 등장하는 초능력입니다. 마음을 보는 법. 흔히 말하는 표현으로는 독심술입니다.
고려사나 삼국사기에 기록될 만큼 유명한(?) 능력인데, 궁예가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던 신통력입니다. 실제로는 '역적 때려잡기'에 유용하게 쓰이는 필살기였다고 하죠. 신하랑 얘기하다가 좀 불리하다 싶으면... "짐은 다 보이노라~ 여봐라!! 이놈을 당장 끌어내고 구족을 멸하랏!!" 웃기지도 않은 능력이지만 원래 권력과 쇼맨십이 영합하면 굉장한 시너지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오늘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대화법으로서의 관심법입니다. 우선 궁예가 하는 것처럼 관심법(觀心法)으로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상대방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이죠. 보통 자기보다 아랫사람(이라고 스스로 정해 놓은 사람)과 대화할 때 이런 종류의 관심법을 씁니다.
일단 관심법이 시전 되면, '네가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하는 식으로 말을 끊고 들어오는 건 다반사입니다. '네가 그렇게 행동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지? 그러니 이렇게 해.' 궁예와 비슷한 능력을 지녔다고 주장하시는 한 정치인이 생각나는 건 왜 그럴까요. (내 눈을 바롸봐 넌 행복해지고... 롸잇 나우!)
대화(소통)가 아니라 일방통행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글쎄요. 저 같으면 그런 사람에게 관심법을 한번 당하고 나면(?) 별로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질 것 같아요.
그란데 말입니다. 저의 일상을 관찰해 보니 자녀에게 이런 관심법을 쓰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었습니다. (내가 궁예였다니!)
아무리 친해도 사장님은 사장님이고 직원은 직원입니다. 그래서 사장님과 직원의 대화는 객관적이 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사장님들은 '나는 갑질 안 했는데 왜 갑질 했다고 하지?' 하며 억울해합니다. 아마 그 이유는 구조 자체에서 오는 소통의 불공정함 때문이 아닐까 해요.
부모와 자녀 사이도 비슷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부모는 '슈퍼 갑', 아니 '울트라 갑'입니다. 인생을 살아도 너보다 더 살았고, 뭘 알아도 너보다는 더 알고, 네가 오늘 뭘 해야 하는지를 다 알고 다 정해 놓았고, 너랑 닮기까지(아니 네가 나를 닮은 거지.) 해서 사실은 뭘 생각하는지 빤히 보이고, 심지어는 너를 사랑해서 내 삶을 희생하고 있는 존재. 그게 부모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절대자'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내가 궁예였다니!)
절대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이유로 대화를 빙자한 훈시와 명령을 할 때가 많습니다. '누가 기침소리를 내었는가. 짐은 다 알고 이써~' 이런 느낌으로 말입니다. 분위기는 대화이지만, 자녀의 세계는 별로 인정받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지요. 부모는 균형을 잡기 위해 애를 써 보지만, 자기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죽어라고 말을 안 듣는 자녀로 인해(!) 이내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전쟁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을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인 의사소통의 불공평과 불일치는 점점 부모에게 입과 마음을 닫게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다가 사자처럼 포효하는 시절이 옵니다. 사춘기입니다. '사자'는 사실 '사춘기 자녀'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노력을 해 보기로 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갑질 당하는 것도 싫은데,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싶어서요. (사실은 틴에이져가 된 큰 딸이 조금씩 두려워지고 있어서... 윽)
일단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기'와 '다 정해 놓고 말하지 않기'입니다. 저희 집은 회의를 점점 자주 하는 편입니다. (물론 저는 다 정해 놓았지만 후후) 최대한 의견을 말하고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할 기회를 줍니다.
아이들이 질문하면 다 답을 주거나 해결해 주지 않고, 짐짓 모른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우 같은 녀석들이 눈치를 채서 잘 안 통할 때가 많습니다. '아빠 모르는 척하는 거지?')
엄마는 자기 전 아이들과 '기뻐요. 슬퍼요. 화가 나요. 미안해요.' 게임을 자주 합니다. 어차피 자기 싫고 더 놀고 싶기 때문에 잠자기 전에 뭘 하자고 하면 협조를 잘합니다. (아빠는 늘 세상을 구하는 일로 피곤해서 먼저 코를 골기 때문에 가장 협조를 안 합니다.)
각자 발언 기회가 동등하고 내용에 대한 충조평판은 금지입니다. '아빠가 이렇게 해서 화가 났어요.'라고 말하면, 속에서는 부글부글하면서도 '그래 ○○이가 많이 속상했겠구나.'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두 안아주고 기도하고 마칩니다.
아이들이 실패하거나 책임을 다하지 못했을 때, 사실은 본인이 가장 속상합니다.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타이밍입니다. 거기에 부모가 '너 그 따위로 살다가 뭐가 될래?' '밥 빌어먹기 딱 좋겠네. 어디 가서 청소나 해!(청소가 어때서!!)' 이런 류의 망언과 폭언을 얹어버리면 아이의 실패감은 배가됩니다.
그러니 아이가 실패하면 그냥 묵묵히 안아주는 게 더 낫습니다. 어차피 또 실패할 테니까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실패가 아이의 스승이 되어 가르쳐 줄 테니까요. 그냥 그때 너무 아파서 아예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만 옆에서 힘이 되어 주려고 합니다.
아이 입장에서 부모는 거의 절대자입니다. 절대자의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분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절대자의 말에 모순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아이는 절대자의 영향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어릴 때는 교회에 다니던 아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기면, 거의 이 지점에서 발생하더군요. 절대자와 그의 대리인이었던 부모에게서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다행히 부모와 상관없이 절대자와 소통하는 인격적인 교류가 어린 시절에 시작되면 조금 다릅니다만, 그렇지 않으면 청년 시절에 제법 큰 혼란을 겪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류의 관심법이 필요합니다. 여기서는 '볼 관(觀)'이 아니라 '관계할 관(關)'을 써야겠네요. '관심을 갖고 대화하는 법'입니다.
그의 세계를 인정하고, 별 것 아닌 이야기에 관심을 가집니다. 들어주는 게 아니라 존중함으로 듣습니다. 훈시하지 않고 토론합니다. 놀아주는 느낌보다는 함께 노는 것을 추구합니다. 애를 보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아이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존재하고 같이 늙어갑니다.
모두, 관심(關心)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돈이 없어서 애를 못 키우는 게 아니고, 시간이 부족해서 아이들이 엇자라는 게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관심이 온통 다른 데 가 있다 보니, 정작 중요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충분히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속으며 살다가, 이제 좀 철이 들어 가는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깁니다. 관심을 표현하고, 그의 인격을 존중합니다. 성경에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천주교나 기독교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의 황금률입니다.
이런 관심법(關心法)이 시전 되면,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대화(인격적인 상호 교류와 소통)가 가능해지기 시작합니다. 반려동물을 키워보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어린아이들도 비슷해서, 기가 막히게 눈치를 챕니다. 저 어른이 나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지 아닌지. 나를 사랑해서 하는 말인지 그렇지 않은지.
끝으로. 이러한 진리는 훌륭한 마느님과 살면서 배우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모든 영광을 마느님께. 마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