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따르미 Aug 16. 2021

"하루 종일 뭐했어?"

VS. "오늘 어땠어?별일없었어?"

  "하루 종일 뭐했어?"


  영어로 번역하면 "What have you been doing all day?" 정도 되는 표현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질문입니다. 한 게 있으면 있다고 말할 것이고, 없으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한 일이 많으면 많다고, 적으면 적다고 담담하게 대답하겠지요. 질문에 맞는 정보만 제공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도 많고 이해 관계도 복잡한 대한민국 부부 사이에서는, 이 말이 다르게 들릴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부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하루 종일 뭐했어? (뭐했길래 집안이 이런 꼴이야?)"


  저 괄호 안에 있는 말이 마치 스마트폰의 자동 완성 기능처럼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 타이핑됩니다. 말하는 사람이 의도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요. 특히 집안이 좀 지저분하거나 설거지를 미처 못했을 때 저런 질문을 받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꼭 늘 깨끗하게 해 놓고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잠깐 지저분하다고 벌금 내고 그런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럴까요?


  대답도 자동 완성 기능으로 생성됩니다. 대략 내용은 이렇습니다. 약간 극(단)적으로 표현해 볼게요.


  "당신 정말 몰라서 물어?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거야, 집안 꼴이 맘에 안 드는 걸 돌려 까기 하는 거야? 내가 하루 종일 뭐 했는지 말해 봐? 아침에 빨래 얼른 돌려놓고 애기 밥 하고 밥 주고... 밥은 해 놓으면 애가 자동으로 먹는 줄 알지? 밥 하기와 밥 먹이기는 달라. 치우는 데 또 그만큼 시간 들고. 씻겨서 옷 입히고 어린이집 보내고 잠깐 청소하고 나면 애기가 와. 그나마 두세 시간이라도 가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매달리는 애기 떼어 놓고 널어놓은 빨래 걷어서 개고 돌려놓은 빨래 일일이 털어서 널고 하면 애기 간식 줘야지. 혼자 먹음 안먹든지 못먹든지 물말아서 오이지랑 먹을텐데 당신 오니까 반찬 뭐라도 차려야 하는데 X팡에서 시킨 물건이 안 오는 거야. 그래서 또 애 둘러업고 이 땡볕에 걸어서 마트를 갔다 왔지. 우리 형편 빤하잖아? 카드 돌려막기도 하루 이틀이지. 이것저것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겨우 콩나물이랑 두부 한모 사 와서 저녁 준비하니까 이 시간이야. 커피 한잔 앉아서 마실 시간도 여유도 없어. 나 매일 이러고 살아. 더 자세히 말해줘?"


  만약 악의 없이 저렇게 질문했다면, 혹은 진짜 하루 종일 뭐 했는지가 궁금해서 저런 질문을 던졌다면, 어휘력이 부족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배우면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배우자가 직접 가르쳐 주면 안 배우자 모드로 들어가기 때문에 개콘 같은 데서 "부부 언어 사전" 같은 코너 하나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폐지가 됐네요.


  정답이랄 것도 없지만, "하루 종일 뭐했어?" 보다는 "오늘 어땠어? 별일 없었어?"가 더 나은 표현입니다. 하루 종일 어떤 미션을 수행했는지가 궁금한 게 아니라 안부를 묻고 '나는 하루 종일 너를 생각했고, 너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어.'를 표현하고 싶은 거라면 말입니다.


  그러면서 무심한 듯 시크하게 집에 있던 배우자와 동선이 겹치지 않게 설거지나 빨래 등 완성되지 않은 퍼즐 조각을 슬며시 함께 맞춰 주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럴 때 배우자가 느끼는 감정은, 6.25 때 저 낙동강까지 쫓겨 가다가 낙동강 오리알이 돼서 일본으로 건너가야 되나 그러고 있는데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는 속보를 받은 느낌일 것입니다.




  배우자가 이런 표현의 디테일에 무신경한 점이 못내 불편하다면, 분위기 괜찮을 때 한번 슬쩍 말해주세요.


  "나는 '하루 종일 뭐했어?' 보다 '오늘 어땠어? 별일 없었어?'라고 물어주는 게 더 좋아요. 그래 줄 수 있어요?"


  '이걸 꼭 말해야 아나? 어휴 자존심 상해.'라는 악마의 속삭임에는 귀를 닫아야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건 초X파이 선전에서나 가능한 일이에요. 말해야 알아요. 때로는 말해도 모르는 걸요. 호호.


  밖에 있던 배우자는 집에 있던 배우자의 우군이 될 수도 있고, 적군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의 이야기도 다음에 한번 써볼게요.) 집에 들어올 때 말 한마디가 그것을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참 저는 이런 걸 결혼 전에 배웠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그래서 혹시라도 어떤 부부님들께는 도움이 될까 해서 쓰는 글이에요.


  여보 미안해. 그래도 요새는 좀 나아졌지 않아? 히히. ㅅㄹㅎ.

작가의 이전글 여행 마지막 날에 사는 악마를 조심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