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는'드립 해서마셔. 돈이 어딨어.'라고 말했었다.
때는 2020년 말, 우리의 가계 부채가 하늘로 치솟고 있던 시절. 그는 3개월간 매일 새벽 택배 상하차 알바를 뛰어야 했다. 알바계의 블랙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 중의 하나인 택배 상하차. '옥천 허브' 검색 한번 해 보면 대충 나온다. 덜덜덜.
카드 빚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그는 불현듯 생각했다. 올해의 MVP에게 상을 주자. 가만 보자. 누구지? 아무리 생각해도 MVP는 마느님이시다. 애 둘을 짊어지고 공부하랴 일하랴 살림하랴 정신없이 돌아가며 협착증과 싸우는 무적의 용사. 그녀는 카페인의 힘이라도 빌려야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커피머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는 줄곧 말해 왔다. "드립 해서 마셔. (돈이 어딨어.)" 돈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 드립 해서 먹는 커피도 나름 마실만 하다. 그러나 생활 패턴이 바뀐 그가 조금 집에 있어 보니, '드립 해서 먹으라'던 말은 진정한 개드립이었음이 드러났다.
원두가 없어서 못 마시는 게 아니다. 드립을 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아침에 대충 챙겨 먹이고 옷 입혀서 애들 보내고 설거지하고 세탁기 한번 돌리고 나면 애들이 온다. 점심은 차려 먹을 겨를도 정신도 없다. 그런데 뭐? 커피를 드립 해서 마시라고? 이런 제길.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화내지 않았다. 우리 형편에 무슨 커피 머신이냐. (사실 어떤 종류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
그는 자기 마음이 변하기 전에 마트로 돌진했다. 그리고 마침 프로모션 중인 드X기 커피머신을 만지작거렸다. 인터넷 최저가보다 5만 원은 더 비쌌지만 자고로 택배와 선물은 다른 법이다. 포장한 상자를 현물로 들고 가서 멋지게 딱 품에 안겨주는 게 참 선물이라는 진리를 결혼 10년쯤 되니 어렴풋이 깨우쳤다. 웬만한 컴퓨터 한 대 값 정도 하는 머신을 과감히 지르고, 챙겨주는 사은품도 꼼꼼히 신청한 후 남자는 부푼 가슴에 커피머신을 안고 콩닥콩닥하는 심장으로 아내님께 갔다. 이런 소비는 자기 스타일 아니지만, 그는 변하기로 했고, 변했다.
그리고.
우리 집은 교회를 다니는데, 지금까지 예수가 줄 수 없었던 진정한 평화가 임했다. 할렐루야. 오 주님. 반 정도는 농담입니다.
간이 커진 남편은 1월 마느님 생신 때에는 식세기를 선물했다. 물론 카드 무이자 10개월로. 돈은 가족을 위해 버는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이 희생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나중에 돈이 따블로 들어간다. 아, 커피도 그가 더 자주 마시고, 식세기도 그가 더 유용하게 쓰고 있는 것은 우리 집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약아빠지고 사랑스러운 진정한 실사구시의 남자 같으니라구.
처음부터 그랬냐고? 아니다. 10년쯤 꾸역꾸역 데리고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온다. 그러니까 살아보자. 살아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