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통해 REAL EGO와 SUPER EGO 사이의 괴리를 발견하다
"나는 어떤 사람이랑 살아도 잘 살 자신 있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들 나더러 착하다고 했다. 너 정도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줬다. 그래서 나도 좋은 사람까지는 아니어도 괜찮은 사람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착각이었다. 결혼은 너와 나의 민낯을 드러내었다. 철저히 밑바닥까지 드러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페르소나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는 '진짜 나'와 '진짜 너'를 만났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진짜 나'는 달랐고, '내가 보는 너'와 '네가 보는 너'도 달랐기에, 참 여한이 없게 싸워 봤다. '진짜 너'를 만나는 것 이상으로 '진짜 나'와의 만남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어?' '나 이것밖에 안돼?' 나에게 어느 정도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리얼 에고에 대한 실망과 죄책감은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이 말은 아마 밤새 부부 싸움하고 난 후에 그 깊은 한과 소울을 담아 내지른 일성이었으리라. 그의 놀라운 철학과 언변을 갖고도 한 여인의 마음을 좌지우지할 수 없었을 테니. 아마 소크라테스의 꿈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남긴 글이 없는 이유는 아마 탈탈 털려서 쓸 힘이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서로가 슈퍼 에고의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면서 만나는 신비한 일이 있다. '진짜 나'와 '진짜 너'를 만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우리를 비교하지 않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집 아내'와 '그 집 남편'의 리얼 에고를 모른다. 페르소나만 알 뿐. SNS는 보여주고 싶은 대로 자기를 보여주는 통로에 불과하다. SNS만 보고 결혼하라면 하겠는가? 그럴 수 없다. 살아보기 전에는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게 서로의 리얼 에고다. 결혼한다고 해서 인생을 다 알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결혼하지 않으면 진짜 자신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마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빛과 같았다. 내가 평생을 만나고 싶어 하던 진짜 나를 만나게 해 주었으니. 그러나 잠이 덜 깬 출근길의 새벽빛, 혼자서 택배 상하차 투잡을 뛰러 나가는 겨울 새벽의 차가운 빛, 밤새 열이 오르는 아가를 바라보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으며 켜 놓은 토끼 램프의 빛. 그렇게 조금씩 늘어난 통장의 빚, 마음의 빚, 시간의 빚. 기독교에서는 '빛의 자녀'가 되라고 가르친다는데, 우리는 시간을 보낼수록 각자 그리고 함께 '빚의 자녀'가 되어갔다.
이제 10년. 함께 갚아야 할 빚이 늘어날수록, 우리는 한편이 되어 간다. 슈퍼에고끼리 살 때는 죽도록 싸웠는데, '진짜 나'와 '진짜 너'는 서로의 등을 맡길 수 있는 전우가 되어 간다. 우리는 전보다 예쁘지 않지만, 서로의 뒷구리를 애정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가 말했다.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야. 누구나 다 한다고. 사랑스럽지 않을 때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란다." 예수님. 알겠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평생 돈도 없으면서 돈 많은 사람과 수다나 떨러 다니셨다는 테스 형은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한다. "젊은이여, 결혼하라. 좋은 처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 진짜 그가 한 말이라면, 그의 말로 돌려주고 싶다. "너 자신을 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