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를 시작하지 않으면 청소는 시작되지도 않는다.
"형님, 여기 테이블하고 보이는 데만 얼른 치우세요. 다 안 보이는 데 집어 넣어 버리면 돼요."
몇 년 전 큰 아이 친구 부부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아빠들은 낮잠, 엄마들은 김녕 라떼인지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잔인지 마시러 출동, 아이들은 신나는 만화 타임. 신나게 자고 있던 아빠들에게 엄마들의 귀환 소식이 전해졌다. 혼비백산, 어질러 놓은 과자 봉지와 부스러기들, 뒤집어 놓은 펜션 세간 살이. 오마이갓. 공습 경보, 공습 경보. 그 때 한 남자가 기지를 발휘했다. "보이는 데만 치워! 일단 거실부터!" "얘들아, 만화 다 꺼!" 평소 그의 불성실한 삶의 자세와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 순간 가장 필요한 행동 강령이었다. 그리고 엄마들의 공습과 불벼락은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 모두 행복했다.
깨끗한 집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호텔이나 모델하우스 같은 집에서 살고파요. 누가 청소, 정리도 다 해주면 금상첨화에요. 그런데 이게 어려운 이유는 각자가 가진 '청소'의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치운 것'이 '청소된 상태'인가? 결혼해서 일이십년을 살아도 이 기준에 대한 대화 한번 없이 사는 부부가 허다하다. 집에서 부모가 청소 다 해주던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이 문제는 좀 심각해질 수도 있다. 청소를 잘 하는 사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다. 마음만 넉넉하고 시간과 에너지만 있으면 청소할 수 있다. 그러나 출근, 육아, 투잡 등등으로 지친 부부에게 쉽지 않은 이야기다. 또 부부 간의 청소 능력에는 편차가 있고, 서로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보편적인 기준을 정하는 것이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위해 도움이 된다.
우선 청소보다 먼저 정리를 해야 한다. 쓸고 닦는 것을 청소라고 생각하고 진공청소기부터 집어 드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공간이나 살림에 별 관심이 없거나, 청소가 더럽게 하기 싫은 사람. 둘 다 깨끗한 집 상태를 선호하는 상대방 배우자에게는 그리 마음에 드는 유형이 아니다. 늘어놓은 것들을 다 집어 넣어야 한다. 그래서 물건을 줄이든지 수납 공간이 있는 집을 택하든지, 집에 있는 물건의 양과 수납 공간의 균형을 잘 맞추어 가구를 선택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할 수 있다. 발에 채이는 장난감이나 물건, 테이블에서 빼 놓은 의자 등을 그대로 두고 청소기만 돌린 다음 청소 다 했다고 하면 반드시 억울할 일이 생길 것이다. 열심히 하고도 욕을 먹으면 점점 하기 싫어진다. 그래서 이런 주제의 대화를 적어도 평생 한 번 이상은 해야 한다. 요새는 전문 정리 업체가 있어서 비용만 지불하면 한 열 명쯤 와서 하루 종일 집 정리를 알아서 해준다. 그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고 안 건드리면서 사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그 다음은 청소의 목적을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부부 간에 '깨끗한 집 상태'의 기준이 서로 같으면 참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이 서로 다르다면, 청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쪽은 청소의 목적을 '깨끗한 집 상태'가 아니라 '배우자의 만족'에 두어야 한다. 이렇게 패러다임만 바꾸어도 갈등의 소지가 줄어들고 청소가 즐거워질 수 있다. "나는 청소라는 과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내 남편(아내)님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거야." 이런 자기 암시와 세뇌는 필수다. 그리고 실제로 해 보면, 해야 돼서 하는 청소는 고통스럽지만, 가족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사랑으로 하는 청소에는 나름 보람이 있다.
정 급할 때는, '일단 보이는 데만 치우라.'는 행동 강령을 기억하라. 청소는 티가 많이 나게 해야 한다. 안 보이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일지라도, 미련 곰탱이 같은 청소 스타일을 평생 고집하는 인간보다는 뱀처럼 지혜롭게 보이는 데만 치우고 배시시 웃는 사람이 더 나을 때가 많다. 자기에게나 상대방에게나 모두 그러하다. 그러나 아직도 집안일과 회사일을 철저히 구분하며, '나는 피곤해서 청소 못하겠으니 깨끗한 게 좋으면 네가 다 해라.'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진 분이 혹시 있다면,
몰라. 알아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