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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Feb 27. 2022

[3]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마르쿠스 가브리엘)

포스트모더니즘 극복 아이디어

 일전에 포스트 모더니즘을 극복하는 데에 철학의 사명이 있다는 글을 썼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훗설을 살펴보기에 앞서 최근 활발하게 활동 중인 신실재론자들의 아이디어를 조명하겠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신실재론자의 대표 주자는 3명으로 압축된다. 독일의 마르쿠스 가브리엘, 프랑스의 캉탱 메이야수, 미국의 폴 보고시안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에 저항한다.

 논의에 앞서 허수아비를 공격하지 않기 위해 필자와 신실재론자 3인방이 공유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하고, 왜 이것을 비판하려는지 설명하겠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문자 그대로 탈-모더니즘을 의미한다. 모더니즘은 세계를 설명하는 단일한 이론을 인격신의 도움 없이 만들어 보려는 시도였다. 따라서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단일한 이론에서 해방, 즉 보편원리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상적 기반은 구성주의, 상대주의, 관점주의이다.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도출되는 ‘도덕 상대주의’의 극복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만들어낸 세계는 (가치론적) 자유 민주주의를 우상으로 여긴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적 시민들은 (젊을수록)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자유주의 사상가로 유명한 J.S.Mill 은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으로 ‘타인 피해의 원칙(Harm to others) 만을 주장했다.


 자유는 소중한 것이고, 자유민주주의는 인류의 물질적, 문화적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공산주의보다 현실적이다. (필자는 자유민주주의자이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우상시, 신격화하는 것은 도덕 상대주의의 정당화로 귀결되기에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건전한 비판이 사라진 상황에서 도덕과 윤리교육은 무의미하다(가브리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득세는 자유민주주의의 우상화라고 말한다). 타자의 자유를 침해하면 도덕성의 발동과 무관하게 사회적, 법적인 피해를 받기에 굳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라는 단순한 명제를 12년간 다른 버전으로 강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미 초, 중, 고 의 도덕윤리교육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센텐스 외의 것을 가르치는 데 한계를 겪어 왔다. 종교가 사라진 상황에서 ‘Why should I be moral’의 근거를 찾기란 어렵다. 수능 문제를 내기 위한 죽은 학문만을 반복적으로 배울 뿐이다. 물론 교과서에서 배우는 이론들은 나름의 가치를 지니나, 일부 사상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성리학 이기론에 대한 수능 문제를 맞히는 학생이, 이기론이 세계의 구성 원리라고 믿지는 않는다. 물론 윤리교육과 교수들은 이러한 사유방식이 그 자체로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겠지만, 인문학적인 사유방식을 배우는 동시에 현대의 세계관을 동시에 파악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이미 죽은 사유를 굳이 배우는 것은 공자, 맹자로 학위를 딴 교조적인 집단을 위함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공자, 맹자, 이황, 이이 등의 ‘이기이원론’ 등이 자본주의의 맹아에서 파생한 ‘정당화된 이기성’에 대항하기에는 무리이다. 지나치게 시대적으로 뒤쳐진 이론들을 과도하게 배우는 현실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노력하고, 이해타산적이면서도 자신에게 충실하고, 타인에게 실패의 탓을 돌리지 않는 쿨한 MZ세대의 심금을 울릴 리 만무하다. (필자가 MZ세대에 속하여서가 아니라 정말로 이들은 남탓을 하지 않는다.)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를 했고, 그 실패를 교훈 삼아 비행기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실패한 모든 것을 혼을 담아 학습할 필요는 없다. 비행기의 개선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실패한 이론에 천착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비행기의 엔진을 개선하기 위한 원리가 되는 것들에 교육을 집중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칸트의 ‘인권’, 롤스의 ‘자유’, 싱어의 ‘동물 해방’등이 더 깊이 다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나아가 현대의 감각으로 사상을 전개하는 지젝이나 호네트, 주디스 버틀러, 마르쿠스 가브리엘 등에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의 학문은 현대의 세련된 언어로 기술되었으며, 현시점의 주제에 대해 논하며, 적절한 질문을 던진다.>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철저히 이기적인 도덕성’이 대다수의 도덕관이 된 것은 비단 한국만의 현실이 아니다. 의미 있는 삶을 강조하는 (캐나다 출신의) 조던 피터슨 교수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사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전히 정당하다” 고 말한다. 일전에 예를 든 것 같이 나의 오른손에서 나오는 특수한 파장만이 불치병에 걸린 노인을 살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러지 않을 권리가 있고,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자비감의 원칙(benevolence principle)은 자유를 제한하는 근거로 정당화될 수 없다.


물론 피터슨 교수가 그런 삶이 의미 있는 삶이라고 결론으로 내리지 않지만, 세계적인 석학의 외침은 도덕 상대주의의 위세가 전세계적임을 반증한다.


 따라서 나는 신실재론자들의 사상을 개괄하기보다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언급하며 ‘도덕 상대주의’의 극복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의 사상을 제한적으로 활용하겠다. 물론 그들의 생각을 변조하지 않는 선에서.


 첫 번째 아이디어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이다. 다음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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