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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Mar 06. 2022

[6]나는 뇌가 아니다(2)-미국은 왜 가만히 있는가

물리주의는 옳은가?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한다.


 본자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귀결되는 ‘도덕 상대주의’를 비판하고자 한다. 누군가는 ‘문화 상대주의’와 ‘가치 상대주의’와 ‘도덕 상대주의’는 다르니,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지만 도덕은 상대적인 게 아니라고 반론하며, 포스트 모더니스트의 결말이 도덕 상대주의가 된다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여기서 누군가는 우리나라 윤리 교과서를 집필하고 검수한 학자들이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 정확히 그렇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화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과 도덕의 상대성은 다른 것임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심지어 문제로도 낸다.) 참고로 본자도 평가원이 검수하는 윤리 교재를 검토했지만, 이들의 완고함을 보며 <철학의 분파인 윤리학이 이렇게 반철학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우리나라 철학계(특히 윤리교육과)가 인문학의 정신에서 멀어지지 않길 바란다. 인문학의 정신은 ‘순응하지 말라’이다.


 여하튼 윤리 교과서에서 말하는 대로 문화상대주의는 괜찮고, 도덕 상대주의는 잘못되었다는 명제는 ‘논거 부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문화와 도덕은 (근원적으로)별개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는 물질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을 아우르는 개념이고, (공통성과 차이를 지닌) 인간이 경작(culturura)한 어휘라는 점에서 그 결과물 또한 공통성과 차이를 모두 가진다. 다시 말하면, 문명(문화의 물리적 양상)에도 공통성과 다양성이 존재하고, 도덕(문화의 정신, 가치적 양상)에도 공통성과 다양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양차 대전 이후 문화 제국주의, 절대주의 등에 대한 반감이 전 세계에 들끓었고, 그 트라우마로 인해 “남들은 건드리지 말자”라는 암묵적인 전제를 만들었다. 즉 전세계의 프로파간다가 (데리다가 좋아하는) difference(차이)와 diversity(다양성)으로만 주창된 것이다. 중요한 건 공통성과 보편성(universal)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적 세계상이다. 좋게 말하면 다원주의이고.

 


 그래서 바야흐로 2020년대에는 새로운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대두했다(고 필자는 본다). 국가 내부에서 상대주의를 주창할 수는 없다.

 (국가는 정치의 집합체이고, 정치는 어떻게든 방향을 설정하고 이에 동조하는 국민을 양성해야 한다. 따라서 상대주의적으로 떠들어 대도 결국은 무언가가 옳다고 강요한다. 후진국일수록 이런 경향은 심하고, 시스템적으로도 국가의 방향성에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말로는 ‘너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한 어떤 일에 대해서는 (구조적인) 페널티를 부과한다. 그러니 국가 내에서는 일종의 방향성을 제안, 교육하며 국민에게 ‘노멀한 차원에서 바람직한 삶’이라는 설명서를 제공한다.)

 하지만 국경 외의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상대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이러한 결과가 ‘자국 우선주의’이다.


 트럼프의 당선은 국가 우선주의의 상징적 사건이자, 심지어 인종주의가 (다시) 활개 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뿐만 아니다.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 푸틴의 장기집권,

 김정은의 막무가내 독재정치,

 홍콩의 민주화 시위 실패,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UN의 침묵(UN은 도대체 무엇인가?)

 Pax Americana를 자처하며 서프라임 사태를 어물쩍 넘어간 미국(그것도 트럼프가 아닌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방어’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는 결국 세계의 정신이 “나만 아니면 돼” 에서 한치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필자는 이러한 패러다임이 양차 대전과 과거 제국주의에 의한 트라우마로 반동되었다는 것 말고도 또 하나의 주요한 요인에 의해 추동되었다고 본다. 바로 20c 니체 이후로 등장한 포스트 모더니즘 사상가들의 정신사적 영향이다. (참고로 종교의 관용을 외친 볼테르는 상대주의를 결론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추동한 첫 번째 요소는 역사적 중대 사건(제국주의와 양차 대전)이고,

 두 번째 요소는 (문화 인류학자들에게 영감을 받은) 프랑스, 독일, 영미로 대표되는 3대 주류 학계 철학자들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사조이다.


  결국 필자가 ‘포스트 모더니즘 극복 프로젝트  행하는 이유는 최근의 핫이슈인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UN 미국의 (점잖게 말하면) 미온적 태도 등의 근원적 이유가,  

 ‘보편 도덕 원리’가 ‘포스트 모더니즘’에 의해 그 빛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아이디어로 돌아가자.

가브리엘의 ‘물리주의’ 비판은 ‘뇌 환원주의’ 비판으로 연결되며, ‘뇌 환원주의’ 비판은 ‘구성주의’ 비판의 단초가 된다. 그리고 구성주의 비판은 곧 상대주의 비판이다.

 보편 도덕 원리를 확립하기 위해(다시 말하지만 내가 주장하는 보편 도덕 원리는 제국주의적 강제를 일삼는 도덕 원리가 될 수 없다.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 같은 절대주의적 원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하지만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다.) 물리주의를 비판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물리주의는 정신과 의식의 세계를 부정하고, 물리적 인과 혹은 경향성만을 맹신하여 시대착오적이고 전제적인 도덕(진화생물학적인)을 강요하는 첨병으로 기능한다. 이를테면 남자는 수만 년 전부터 사냥을 해왔으므로, 남자는 일을 하고 여자는 집을 봐야 한다는 둥.

 둘째, 정신적인 것은 (뇌, 또는 기본입자) 물질의 부산물일 뿐이니, 자유의지 또한 환상이고, 자유의지가 환상이므로 도덕(적 책임)은 난센스이다, 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가브리엘이 <나는 뇌가 아니다>에서 물리주의를 비판한 171p. 논증을 인용, 재구성한다.


 <메리는 미래에 자연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며 그 앎을 오로지 물리학의 언어로 (수학적 등식들로) 표현한다. 그러나 메리는 완벽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녀는 완전히 색맹이기 때문이다. 메리는 오직 회색들만, 그러니까 밝음과 어두움만 본다. 그녀는 완전한 흑백 세계에서 산다. 요컨대 메리는 컬러풀한 색상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감각 수용기들이 파장 437~530 나노미터 범위의 전자기파에 의해 유발되는 정보가 <녹색> 임을 안다.(본 자는 녹황색 색약이다. 심지어 그런 색상이 있다.고들 한다. 그냥 말하고 싶었다.)


 이 대목에서 프랭크 캐머런 잭슨(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메리의 앎은 완벽할까, 아니면 결함이 있을까. 잭슨의 대답은 메리의 앎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물리학적 정보를 그녀가 보유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무언가를 모른다. 즉 제주도 비자림의 녹색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른다. 물론 그녀는 비자림이 거의 온통 녹색이라는 것을 (전자기파 측정을 통해 알아낼 수 있으므로) 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처음 비자림에 입장했을 때 겪은 녹색 체험에 대해서는, 망막의 원뿔 세포들과 막대 세포들과 뇌의 시각 담당 구역들이 온전할 때 그 체험이 일어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만일 그녀가 성공적인 수술을 통해서 색깔들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녀는 예전에 모르던 것을, 곧 ‘비자림의 광경’ 녹색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물리주의는 틀렸다고 잭슨은 결론짓는다.>


 결국 이 효과적인 논증의 이면에는 현상적 인식(인상)과 지향적 인식(의식)을 구분한 ‘에드문드 훗설’ 이 숨어 있다. 결국 물리주의는 물리주의의 여백을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 꽤 명백해 보인다. 즉, 등식이 포괄하지 못하는 다채로운 생활세계의 영역(체험)을 ‘물리주의자’들이 무리하게 ‘수학적 등식’ 등으로 기술하더라도, 우리가 주관적으로 체험(현상에 대한 지향을 통한 물리적+@의 경험) 한 것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주의를 비판하는 두 번째 논증은 179에서 인용, 재구성한다.


 <물리학의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에 대한 우리의 앎, 곧 우리의 주관적 앎을 제거하거나 개선하거나 제쳐 둘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물리학의 언어를 배울 때 사용하는 어휘를 통해서만 물리학을 이해하는데, 물리학의 어휘는 때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시간의 화살을 엔트로피를 통해 설명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건 마치 우주의 작동방식을 ‘신의 섭리’라는 어휘로 퉁치는 것과 비슷하다(필자의 주)- 왜냐하면 도리어 엔트로피 개념이 시간의 흐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의 흐름은 엔트로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엔트로피를 통해 설명하는 것은 시간 의식에 대한 몰이해를 은폐하는 사이비 설명에 불과하다. 물리학 덕분에 우리가 시간에 대해 더 많이 아는 것은 사실이지만(시간이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이라는 것 등),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시간 의식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아는 것은 아니다. 즉 물리주의는 의식을 포괄하지 못한다.>



 가브리엘의 물리주의 비판은 과학도들에게도 꼭 추천할만하다. 굳이 장하석의 <온도계의 철학>을 읽지 않아도 -물론 좋은 책이고, 추천한다- 가브리엘의 물리주의 비판은 다양하고 재미있다. 다음 시간에 또 다른 물리주의 비판을 전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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