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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준 Apr 05. 2022

[철학 에세이] 죽은 물고기만 물살을 따라간다.

나는 길들지 않는다.

죽은 물고기만 물살을 따라간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와 영화 <Into the Wild>


키에르케고르는 병에 걸린 병자이자 리얼한 개인이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 자체가 병이 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인생을 병자로서 바라보며 삶을 찾아나갔다. 병을 불안이라는 말로 대체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키에르케고르가 리얼한 사람이라고 새삼 깨닫게 되며 덴마크 사람이 왜 이렇게 그를 존경하는지도 이해가 간다.


 대체로 시류에 저항하는 사람은 아픈 법이다. 좋은  좋은 거라는 말은 리얼하지 않아도 좋으니 아프지는 않겠다는 말과 동의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사고에 저항하는 실존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이런저런 고통과 불안이 동행한다.  사람들에게 키에르케고르는   위안이  것이다.


 사람이 병자이지만 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이미 병이 들었다는 증거다. 병자이고 병이 들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이렇게 어려웠는지 생각하다 보면 그때야 비로소 병에서 벗어나게  가능성이 열린다. 인간의 의식과 심리는 항상 가까운 곳에 답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해답을 찾는 여정은 프로도의 시련만큼 거칠고, 3 불안만큼 위태롭다(항상 가장 완벽하고 효율적인 답을 찾지 못하기에 인생은 인생인 것이다). 병이 들었다고 생각할  비로소 이상과 현실이 괴리적이라는, 사회의 진실을 깨닫게 된다.

 시크릿 같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혹은 성경보다는 미국 자본주의적 성공주의 설교를 많이 들은 사람은, 혹은 트럼프의 정치행태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곤 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공정하거나 혹은 내가 원하면 어느 것이든 바람대로 이루어질  있다고 믿으며, 인생은 결국 희소한 자원을 누군가 쟁취하는  아니라 모두가 1등이   는 동화 속 이야기라는 판타지에 심취해 있다. 그리고 자원의 유한성과 경쟁의 논리를 부정한다(로크가 들으면 천지개벽하겠지).


 내부고발이나 공익 신고에 대해서 매스컴이 떠들고 그 근절이 정부의 핵심과제라고 홍보하지만 실제로 이 과정을 겪어 본 사람들은 그 진상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런 사회의 부정의한 실체를 진짜로, 몸소, 실천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이제는 털고 일어날 최소한의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냥은 누구나 다 안다. 네이버 지식인이 말하고, 중2가 말하고, 스타벅스 옆자리에서 말하고, 택시기사가 말하고, 심지어 예능에서 코미디언도 말한다. 이제는 가방끈 짧은 것과 책을 읽지 않는 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시대가 된 것만 같다)


  글을 읽는 사람은 실존적으로 리얼하게 사는 사람에게 어쭙잖은 충고를 하지 않길 바란다. 충고하는 당신에겐 이를 해결하려는 진정한 의지가 없고(너무 자책 마라. 타인을 동일시하는  인간에게 불가능의 영역이다), 의지가 없으니 능력이 생길 수가 없으며, 의지와 능력이 없는데 충고하는 것은  하나의 자기기만이자 분수를 모르는 자가당착일 뿐이다.

 단지  사람을 누구도 충분히 이해할  없지만 애써 견디고 있다는 사실에 함께 오만상을 지뿌려주고 지금의 힘든 것이 당신에게는 지구에 핵이 1000 떨어지는  이상의 중대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것만이 그나마 나은 대안이  것이다.


 왜 이렇게 하지 않았는지, 왜 더 좋은 방식으로 일을 풀지 않았냐고 묻는 것은 시간의 불가역성에 대한 인지가 상담자에게만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우월감과 정복욕의 또 다른 얼굴임을 기억하길 바란다(참고로 칸트에 의하면 시간의 불가역성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니 그걸 드러내는 사람은 참으로 드러낼 게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또한 범박한 해결책으로 문제를 접근하는 것은 그 사람을 완전히 교란하는 것이며 그 사람은 겉으로는 그런 척하지 않아도 올인의 자세로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진화는 인간의 것이지만, 인생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것이다. 개인은 실존적으로 살아갈  언젠가는 시련을 겪고 병에 걸리기 마련이다(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누군가가 병자라는 타이틀(외연) 나에게 속한 것이고  속성(내포) 나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순간  누군가가 진짜 병에 들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인간은 병이 들었을  무리한 것을 연결시켜 생각할  있으며(사과가 썩었네.   죽을 거야), 아플  과거에 이랬어야 한다고 이중적인 과세(상처) 하며, 존재론적으로 위태로울  누군가에 완전히 기대고 싶어 하는 법이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당신은 존재론적으로  발을 땅에 디디고 있다. 그것이 존재론의 찬란한 강점이다. 존재는 현상의 불완전함으로 훼손되는 것이 아니다.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당신의 인류로서의 존엄성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당신의 리얼함을 본질적으로 논한 것이다. 따라서, 뻔한 소리지만 지금 내가 의미 있는 것을 하고, 비겁함을 피하며, 그로 인한 격정의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할   무엇보다 리얼한 아픔을 느낄  다. 물론 이는 치료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를 염두에 두었을지라도 옳은 것을 선택한 리얼함에 대해 칭찬해주며, 상담자 본인은 이렇게  용기가 부족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의 비겁함을 담담히 드러내는   나은 위로가  것이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의 결론대로 행복은 나눠야 커질 수도 있지만(Happiness is real when we shared),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이상 사회적 유용성, 기능이 훼손될 수도 있다(장기적으로는 그럴 리가 없겠지만). 누군가 서울대를 가면 누군가는 서울대를 못 가게 되는 것은 공정성의 원리를 어긴 것은 아니지만 리얼한 아픔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불행은 나눠야 작아지는 것처럼 보일  있지만, 사실은 그만큼 나는 나로서  리얼한 아픔을 받아들일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적어도 삶의 무게에 직면하는 사람에게는.


 생각보다 우리 사회에는, (리얼한 나와 당신과, 그 옆사람을 라) 병든 사람은  많다. 사르트르처럼 얼굴을 찌그려야만 아픈 것은 아니다. 우리는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통받고 심리적으로 위태로우며, 능력의 한계와 자신의 불완전함에, 그리고 흔들리는 푯대처럼 갈팡질팡하는 삶의 의미에, 옳은 일보다는 편한 일을 10  선택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에, 현명하지 못하고 무지한 것에 아파한다.


  사회는 추상적인 관념이라 정의와 공정이라는 판타지를 리얼한 척 외치는 게  임무이자 권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각자는 가장 일회적인 개인이며, 나는 원초적으로도, 존재론적으로도 리얼한 존재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논리보다는 겸허함을 무기로 삼아 타인의 얼굴을, 리얼한 개인을 맞이해야만 하고  시선으로  자신을 대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처럼 모든 것을 올인하여 그분께 다가가는 것이 어렵다면,

 적어도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쿼터인은 하려고 무진 노력하는 나와 당신이 되길 바란다. 그렇다면 우리는 반쯤은 리얼만남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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