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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뿔난 토끼 Mar 21. 2021

이 방향이 옳은 길일까?

그건 중요하지 않아.

몸만 아프면 되는데 마음까지 덩달아 왜 아픈 걸까?

남편은 췌장암 수술 후에 항암을 겪으면서 몸도 마음도 세트로 아파했다.      

소화기 암이라서 그런지 수술 후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시로 가스가 나오거나,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에 가야 하다 보니 이런 생리적인 현상 때문에 남편의 꼼꼼한 성격상 이를 극복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들을 극도로 불편해했다.

예전부터 남편은 태생이 바른 생활 맨 이어서 그런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아프고 나니 이전보다 더 소심해져서 여드름을 수줍어하는  사춘기 아들처럼 남의 시선에도 쓸데없이 예민해지고 남들 앞에 나서기조차도 꺼려했다.

그런 남편을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는 남편에게 당당하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라고 등을 떠 밀수도 없고, 평소 남편의 성격을 잘 알기에 그가 얼마나 힘들지 충분히 알기 때문에 마음이 더없이 아플 뿐이었다.     

아픈 것을 털어내려면 유쾌하게 사람들도 만나고 일분일초라도 헛되게 보내지 않고 즐겁게 놀아도 시원찮을 판국에 생리적인 현상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가 될까 봐서 사람 만나는 일조차도 극도로 꺼리게 된 남편을 위해 나는 우리 집 베란다에 남편과 내가 마음 놓고 이용할 우리들만의 공간인 베란다 카페를  만들기로 했다.

"그래. 남들 눈치 봐가면서 밖에서 스트레스 사서  받지 말고 편안하게 내 집에서 즐기자. 베란다에 테이블 하나 갖다 놓고 여기서 커피도 마시고 생강차도 마시고 라면도 끓여먹자. 그나저나 공사비가 얼마나 들까?"

나는 남편을 위해 베란다 공사를 하기로 했고 비용을 어림잡아보며 당장 공사를 감행하기로 했으나 항상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겁 없는 마누라를 보는 남편은 한숨부터 짓는다.

"지금 이 상황에 쓸데없는 곳에 돈 쓸 필요 뭐 있어.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

남편의 이 말 때문에 나는 화가 치밀었다.

"뭔 소리야? 지금까지 죽도록 아꼈잖아. 그렇게 아끼기만 하다가 한 푼도 못써보고 암에  걸렸잖아. 억울하지도 않아? 그러니까 이번에는 아끼지 말고 쓰자."

그러나 이런 나와는 다르게 한 집안의 가장이었던 남편은 침착했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안 돼. 이런 때일수록 더 아껴야지."

“아니, 그동안 가족들을 위해서 희생만 하고 살았으니 이번에는 우리를 위해서도 살아 보자.”

베란다에 둘만이 사용할  카페를  만드는 문제로 남편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결혼생활 이십이 년 만에 처음으로 남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성질 급한 내가  남편의 한결같은 근검절약 정신에 화가 나서 순간 버럭 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남편에게 무척이나 미안하다.

 내가 남편에게 화를 낸 이유는 암에 걸려서 인생에 먹구름이 끼이고 그 여파로 잔뜩 주눅까지 들은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슬프지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암과의 싸움에서 이제는 더 이상 절약하는 삶이 미덕으로 여겨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평소에 화를 내는 일이 거의 없었던 마누가라 갑자기  강한 어조로 버럭 해서   몹시 놀란 눈치이다.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결혼생활 이십이 년 동안 한결같이 열심히 일했고,  훌륭한 가장 노릇을 성실히  해주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암에 걸렸고, 그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성실했던 가장은 지금도 암에 걸린 자신을 위해서는  돈 한 푼 쓰기가 미안해서 우물쭈물 하다다  결국은 마누라에게 돈 아낀다고 폭언까지 들어야 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물론 남편이 하는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건강했던 사람이  암수술로 인해 췌장이 없는 1형 당뇨환자가 되어버렸고, 수술과 항암을 겪으면서 직장을 그만두었으니  수입도  없어졌고,  아이들은 둘 다 대학생이 되었으니 돈이 한참 많이 들어갈 시기이기 때문에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할, 가뜩이나  미래가 불투명한  판국에 베란다를 뜯어내고 수리해서 마룻바닥을 깔고 탁자를 놓고 한가롭게 커피를 홀짝이겠다고  견적을 뽑는 마누라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그러나 아프고 나서 힘이 없어진  남편과의 싸움에서  목소리가 큰 마누라는  단번에 승리를 했고, 드디어  베란다에는 햇볕을 마음껏 빨아들이는  반투명한 지붕이  씌워졌고,  바닥은 견고한 마룻바닥이 뽀대 나게  깔린  남편과 내가 이용할 소박한 둘만의  카페가  완성되었다.

그 후로 남편과 나는 투자를 했으니 본전을 뽑기 위해서라도  매일 우리 둘만의 공간인  베란다 카페를  의무적으로 이용하는 고객이 되었다.     

우리의 하루 일과는 늘 베란다 카페에서 시작해서 베란다 카페로 끝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베란다에 나가서 새들의 소리와 신선한 공기를 맛보고 하루를 시작했으며,  밤늦은 시간까지 베란다에 앉아서 저 멀리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의 불빛을 보며, 아직은 불투명한 우리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이야기했고, 낮에는 이곳에서 라면을 끓이며 눈부신  햇빛을 양념 삼아 젓가락에 면발을  휘감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빗소리를 음악 삼아 아메리카노 향을 음미했다.     

이 곳에서는 최소한 음식을 빨리 먹고 눈치껏 급하게 자리를 비켜줄 필요도 없었고,  생리적인 현상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당황할 필요도 없었다.

"암에 걸렸다고 해서 매번 나쁜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구나.

암에 걸린 덕분에 우리에게 이렇게 근사한 전용 카페가 생겼잖아."

암에 걸리기 이전에 남편과 나는 무조건 열심히만  살면 먼 미래에는 당연히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고 살아왔지만 막상 암과 만나고 보니, 행복은 미로 속에 들어가서 감쪽같이  숨어버렸고 우리가 숨은그림 찾기를 하듯이 열심히 찾아 헤메여도 행복을 반드시 찾게 되리라는 보장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남편과 나는 우리가 그동안 막연하게  열심히만 살아오면서  미처 모르고  놓칠 뻔했던 행복을  하나씩 찾아 나서기로 했고 그 첫 번째 행복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편히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인 베란다 카페였던 것이다.

 이번 일을 경험으로 우리는 행복은 숨어있어서 쉽게 찾아내긴 어렵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붙잡아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란다 카페는 암으로 인해  죽다 살아날 만큼  충분히  지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공간이 되어주었고, 매일매일 우리는 이곳에서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결과, 한 푼이라도 아껴도 시원찮을 판국에 겁 없이 공사판을 벌여 베란다에 카페를 만든 통 큰  마누라와  단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발언권이 작아져 의기소침하고 우울해 했던 남편은 베란다 카페로 인해 충분히 행복하고 또 행복할 수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저당 잡혀서 현실을 희생하느라,  암에 걸리기 이전처럼 아끼고 또 아끼느라 이런 일탈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남편과 나는 이런 소소한 행복을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베란다 카페를 계기로  깨닫게 된 것은  지금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이 우리에게는 찬란하고 놓치면 안 되는 결정적인 순간이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금 당장 시작하면 되고,  초등학교 때 학교 숙제를 빌미로 억지로 급조해서 만들어 냈던 어린 시절 우리 집 가훈처럼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라는 것이다.     

암에 걸린 후에 우리가 시도했던 행복 찾는 방법이  옳은 길인가 아닌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행복했다면 이미 그것으로 충분히 바람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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