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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뿔난 토끼 Apr 04. 2021

또다시 찾아온 봄

이걸로 충분해.

"여기 좀 봐!  화분 한쪽에는  부추를 심었고 또 한쪽에는 곰취를 심었어." 

"왜?"

"부추꽃은 여름에 피고 곰취꽃은 가을에 피니까 계절마다 꽃을 보려고 이렇게 한 곳에 심었어."

"어,  걔네들도 꽃이 피긴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꽃은 그런 소박한 꽃이 아니고 화려한 꽃인데 비싼 화분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암 수술 후 추적관찰 중인  남편이 베란다에 있는 대형 화분에 부추와 곰취를 옮겨 심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들떠서  올해부터는 철마다 꽃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한다.

"모양 빠지게 이게 뭐야? 볼품없잖아."

내가 좋아하는  꽃은 작고 여리고 하늘거리는 작은 국화과의 꽃들인데 남편이 심어놓은 부추꽃이나 곰취꽃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잠깐 동안  심통이 나서 남편에게 투덜거렸다.

"부추꽃도 예뻐. 그리고 다른 야생화들보다 꽃도 오래가."

남편도 지지 않고 받아친다.


                         남편이 꽃구경을 시켜준다고 베란다 화분에 심은 부추와 곰취




아프기 전에도 꽃을 좋아했던 남편은 작은 야생화 하나에도 온갖 정성을 들여 가꾸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남편이 집에 있는 날이면 이웃 할머니들이  마실 와서  우리 집 화단에서 남편이 가꾸고 있는 꽃에 대한 수다를 떨곤 했었다.

남편은 여자인 나보다도  훨씬 드라마나 꽃에 대해서는 여성스러운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다.

 나는 종종 그런 남편을 부를 때 김 마담이라는 호칭으로  남편의 여성스러운 섬세함을 놀려대곤 했다.

"김 마담, 내 커피는 블랙이야. 알지?"

그럴 때마다 남편은 싫지 않는 표정으로 커피를 탔고 우리는 사이좋게 커피를 마시며 왜 우리 이웃집은  개새끼를 묶어놓지 않는가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으며, 작은 풀꽃들의 품성이나 그것들이 좋아하는 땅의 습성들을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올 해의 김 마담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봄이 되었건만 그렇게도 좋아하는 꽃을 사러 꽃집 투어를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생뚱맞게도 밭에서 부추를 뽑아다 화분에 심어놓고 부추전도 아닌 부추꽃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아프고 나더니 영 사람이 변했어. 이제는 3000원짜리 꽃값도 아까운가 봐."

"한 해만 보고 없어지는 꽃은 낭비잖아."

"그건 아니지.  3000원짜리 화분 몇 개만 사면  봄부터 가을까지 질리도록 꽃이 피는데 그 정도면 가성비가 엄청 뛰어난 거지."

김 마담과 이런 식의 대화를 농담처럼 주고받다 보니 문득 가슴이 뭉클해진다.


아. 이런 것도 참 행복하구나.

올해가 우리 남편(김 마담) 이 아프고 나서 세 번째 맞는 봄이구나.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이 사람과 같이 다시 돌아오는 계절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참 많이도 울었었다.

그때에는 밭 이랑에 난 풀 한 포기를 봐도 목이 메었고, 길을 가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 마당에 핀 꽃을 봐도 눈물이 나왔었다.

나는 그렇게 매 순간순간을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가불까지 해가며 불안하고  우울하게 살아왔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동안 정신줄을 놓고 살긴 했어도 한해 두 해를 지나 어느덧 삼 년째 봄을 마주했다.

참 좋다.

삶이라는 것이 무작정 버티고 나니 이런 반전도 있기는 하구나.


김 마담.

그런데 이번에 내가 좋아하는 화려한 꽃 대신에 소박한 부추랑 곰취 꽃 나한테 보여준다고 한 것은 그대가 확실히 실수한 거야.

돈 한 푼도 쓰기 아까워서 꽃 하나도  안 산다고 하는 그 순간부터  나는 진짜로 꽃이 더 사고 싶어 졌거든.

수선화, 튤립, 꽃잔디,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뭐더라 꽃까지.

나는  반드시 다  사다가 내 꼴리는 대로  꽂아놓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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