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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뿔난 토끼 Mar 08. 2021

제발 상처 받지 마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췌장암 수술 후에 회복을 순조롭게 하고 있는 남편의 상태는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2인 병실에서  남편의  맞은편에는 육종 암 환우가 있었는데 남편과 나이 대가 비슷했고 둘 다 암 환우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두 사람은 내가 없는 시간에도 유쾌하게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서로 편안하게 잘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대방 환우의 마나님이 병실에 찾아왔다.

두 사람은 커튼을 쳐놓고 다정하게 음식을 먹으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가는귀가 먹었다 싶을  정도로 작은 소리들을 잘 듣지 못하던 내 귀에 분명하게 꽂히는 육종 암 환우의 소리.

"저 쪽 남자는 췌장암이래. 췌장암은 못 살아. 다 죽어."     

이 소리를 분명 남편도 들었고 나도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

는 둘 다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서로가 태연한 척했다.

하지만 태연을 가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음이 아리고 아침에 먹은 빵조각이 뱃속으로 넘어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목에 탁 걸린 느낌마저 든다.

이런 식빵.

'내가 만약에 선생이고 네가 학생이었다면 넌 오늘 나한테 죽었다.

췌장암이 반드시 죽는다는 공식이 어디에 있는데?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기 라도 해?

만약에 교과서 다 뒤져서 그런 말 안 나오면 어쩔 건데?

체벌이 가능한 시대라면 넌 나한데 스무 대쯤 맞고 개평으로 열두 대 더 맞았다.

그게 같은 처지 암 환우로서 할 소리냐? 입장 바꿔 생각 좀 해보시라고.'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만 비명을 지르고  있을 뿐 겉으로는 아무것도 못 들은 얼굴을 가장하며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암에 걸린 것도 서럽지만 그중에서도 췌장암이라서 더 서럽다.     

남편의 얼굴이 안쓰러워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어 컵라면을 데운다는 핑계로  탕비실에 갔다.

병원 탕비실에는 전자레인지가 있고 식수 물이 있어서 그런지 간병인들의 만남의 장소인 것 같다.

입고 있는 유니폼이 같은 색인 걸로 봐서는 서로 아는 사이 인 듯한 간병인 둘이서 내가 듣거나 말거나 신나게 떠들고 있다.

"글쎄, 내가 맡은 여자는 암 환자 주제에 아침만 되면 얼굴에 뭘 찍어 바르고 떡칠을 해."

"볼 쌍 사납게 환자가 뭔 화장이래?"

"누가 아니래?"

"그래도 지가 여자라고 암 환자 주제인 꼴에 이쁘게는 보이고 싶은가 보네. 호호호"

이 곳에서 와서 듣다 보니 병실 환자들의 신상이 다 까발려진다.     

이번에도 내가  화장한 암 환우는  아니지만 암으로 아픈 것도 서러운데 은근히 조롱까지 받는 것 같아 또 화가 나고  뭉근히 슬퍼진다.     

뭐래?

누군 태어날 때부터 암 환자로 태어난 줄 알아?

간병인들도 이제부터는 자신이 맡은 환자의 신상에 대해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비밀 서약 같은 서류에 사인하고 일했으면 좋겠다.

젠장, 진짜 감시카메라가 필요한 곳은 어린이집도 학교 앞 도로변도 아니고  병원 탕비실이네.     

이곳을 가도 저곳을 가도 암 환자의 보호자는 암 환자만큼이나 서럽고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다시 내 자신에게 되 뇌 인다.

'이제 시작이야.

제발 이런 일로 상처 받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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