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췌장암 수술 후에 회복을 순조롭게 하고 있는 남편의 상태는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2인 병실에서 남편의 맞은편에는 육종 암 환우가 있었는데 남편과 나이 대가 비슷했고 둘 다 암 환우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두 사람은 내가 없는 시간에도 유쾌하게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서로 편안하게 잘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상대방 환우의 마나님이 병실에 찾아왔다.
두 사람은 커튼을 쳐놓고 다정하게 음식을 먹으며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평소에 가는귀가 먹었다 싶을 정도로 작은 소리들을 잘 듣지 못하던 내 귀에 분명하게 꽂히는 육종 암 환우의 소리.
"저 쪽 남자는 췌장암이래. 췌장암은 못 살아. 다 죽어."
이 소리를 분명 남편도 들었고 나도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
는 둘 다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서로가 태연한 척했다.
하지만 태연을 가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음이 아리고 아침에 먹은 빵조각이 뱃속으로 넘어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목에 탁 걸린 느낌마저 든다.
이런 식빵.
'내가 만약에 선생이고 네가 학생이었다면 넌 오늘 나한테 죽었다.
췌장암이 반드시 죽는다는 공식이 어디에 있는데?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기 라도 해?
만약에 교과서 다 뒤져서 그런 말 안 나오면 어쩔 건데?
체벌이 가능한 시대라면 넌 나한데 스무 대쯤 맞고 개평으로 열두 대 더 맞았다.
그게 같은 처지 암 환우로서 할 소리냐? 입장 바꿔 생각 좀 해보시라고.'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만 비명을 지르고 있을 뿐 겉으로는 아무것도 못 들은 얼굴을 가장하며 태연하게 웃고 있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암에 걸린 것도 서럽지만 그중에서도 췌장암이라서 더 서럽다.
남편의 얼굴이 안쓰러워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어 컵라면을 데운다는 핑계로 탕비실에 갔다.
병원 탕비실에는 전자레인지가 있고 식수 물이 있어서 그런지 간병인들의 만남의 장소인 것 같다.
입고 있는 유니폼이 같은 색인 걸로 봐서는 서로 아는 사이 인 듯한 간병인 둘이서 내가 듣거나 말거나 신나게 떠들고 있다.
"글쎄, 내가 맡은 여자는 암 환자 주제에 아침만 되면 얼굴에 뭘 찍어 바르고 떡칠을 해."
"볼 쌍 사납게 환자가 뭔 화장이래?"
"누가 아니래?"
"그래도 지가 여자라고 암 환자 주제인 꼴에 이쁘게는 보이고 싶은가 보네. 호호호"
이 곳에서 와서 듣다 보니 병실 환자들의 신상이 다 까발려진다.
이번에도 내가 화장한 암 환우는 아니지만 암으로 아픈 것도 서러운데 은근히 조롱까지 받는 것 같아 또 화가 나고 뭉근히 슬퍼진다.
뭐래?
누군 태어날 때부터 암 환자로 태어난 줄 알아?
간병인들도 이제부터는 자신이 맡은 환자의 신상에 대해 절대로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비밀 서약 같은 서류에 사인하고 일했으면 좋겠다.
젠장, 진짜 감시카메라가 필요한 곳은 어린이집도 학교 앞 도로변도 아니고 병원 탕비실이네.
이곳을 가도 저곳을 가도 암 환자의 보호자는 암 환자만큼이나 서럽고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다시 내 자신에게 되 뇌 인다.
'이제 시작이야.
제발 이런 일로 상처 받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