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공무원을 아느냐
공시족 K 씨. 노량진 제일고시학원에서 종합반을 들으면서 공부하고 있다. 그는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현 시대의 안정적인 직업에 매력을 느껴 공무원 수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는 문득 과거에는 공무원보다도 대기업이 봉급도 더 많았고 공무원의 인기도 지금보다 시들했는데 왜 선배들은 공무원이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공무원 그 이야기를 하려면 벌써 30년 전인 군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나른한 봄날, 나는 전북 임실의 군부대에서 M16 소총을 끼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탄약고 앞에는 산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다랑이 논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고, 농부는 소를 몰며 ‘이랴, 이랴’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1년 후 제대를 하고 학교에 복학을 하면 무엇을 하고 살아갈까를 고민했다. 문득 쟁기질하는 농부가 시야에 펼쳐졌다. 농부를 무연히 바라보면서 제대하고 농부가 될까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고 시골에서 자란 나는 농촌일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얼른 꿈을 접었다.
그다음 생각한 것이 사업가였다. 하지만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비는 것처럼 사업 역시도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사관으로 명퇴를 하고 채광사업에 실패해 근근이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집 형편으로는 도저히 사업을 밀어줄 만한 경제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때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의 말이 일순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네가 사회에 나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무원밖에 없을 거야.
그 당시 순진하고 융통성 없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공무원이 천직이라는 말을 자주 하고는 했었다. 그 친구들이 내뱉는 그 말이 이상하리만치 꿈의 항구로 내게 다가왔던 것은 앞날을 예언하는 기나긴 서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기로 입술을 진득이 깨물었던 것은 어디에 기인했던 것일까. 그리고 뜻 모를 자신감도 용솟음치는 것은 무슨 이율배반이었는지 모른다.
휴가 나오자마자 공무원 수험 서적을 사기 위해 안양에서 제일 큰 대동서림으로 달려갔다. 화공직 9급 공무원 수험 과목은 국어, 국사, 윤리, 화학공학일반, 공업화학, 전자계산일반이었다. 그 책을 사들고 자대에 복귀할 때는 마치 독립투사 같은 삼엄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군대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던 어느 날 밤, 당직사관을 서고 있던 인사계의 호출이 있었다. 나는 혹시 내가 무엇을 잘 못해서 불렀나 덜컥 겁이 났다. 인사계는 어깨 휘장에 갈매기 두 마리기 걸린 중사였다.
인사계가 나를 찾은 것은 뜻밖이었다. 방송대 교재에 있는 한자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당시 인사계는 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교과서에 한자가 많아 당황하고 있었다. 인사계는 병사들에게 한자를 누가 많이 아냐고 물었고 그 중에 한 병사가 나를 지목했던 모양이다.
인사계는 사납게 생겨먹은 모양과는 달리 순한 양처럼 모르는 한자를 내게 물었다. 나는 한자음과 뜻을 알려주었다. 예를 들어서 ‘이거 읽어봐’ 하면 ’ 구축입니다' 했고 ‘무슨 뜻이지?’ 하면 ‘몰아내서 쫓아낸다는 뜻입니다’ 답을 해 주었다.
사실 우리 세대도 한자 세대는 아니었다. 그 당시 문교부 지정 한자 중학교 때 900자 고등학교 때 900자 도합 1,800자를 배웠다고 하지만 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기 때문에 한자공부는 등한히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문학을 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한자 공부를 했었다. 문학과 한자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휴학을 하고 군대 가기 전에 약 8개월간 단양에 있는 소백산에 있는 구인사에 들어가 신춘문예 준비를 한 적이 있다. 그때 틈틈이 ‘비법 한자’라는 교재를 통해 1,800 한자를 쓸 수 있을 정도로 공부했었고 군대에서도 틈틈이 한자공부를 했는데 그 장면을 인사계가 유심히 지켜봤던 모양이었다.
인사계는 돌연 공무원 시험 접수하는 날이 언제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원서 접수 날짜에 맞춰 4박 5일 휴가를 주었다. 군 생활을 해본 병사는 알 것이다. 그 휴가가 얼마나 달콤하고 가슴을 설레게 하는지를. 하지만 휴가를 받고 나와 공무원 원서 접수를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원서는 군대 전역 6개월 이하만 접수할 수 있었는데 나는 나는 1년 정도 군 생활이 남아 있어서 원서 접수할 자격이 없었다.
제대하고 본격적으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시험도 9급에서 7급으로 변경했다. 졸업하기 전에 공무원 합격이 목표였다. 공무원 시험에 매진하기 위해 학과도 주간에서 야간으로 옮겼다. 대학 인근에 있는 연쇄 도서관에서도 새우잠을 자면서 수험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 2시에 잠을 잤고 아침 8시에 일어나 학교에 가서 500원짜리 국밥을 먹어다. 구내식당에 밥값이 천 원인데 아침은 어제 저녁 남은 찬밥으로 국밥을 말아주면서 500원을 받았다. 가난이 끼니였던 내게 500원짜리 국밥은 그저 눈물겹도록 고마울 따름이었고 밥숟가락에 올린 깍두기는 꽃 한 송이 붉게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는 했다.
9시부터는 노량진 제일고시학원에 종합반 수업을 들었다. 국어, 국사, 윤리였다. 국사와 윤리는 수업이 머리에 쏙쏙 들어왔지만 국어는 경험이 없는 강사여서 그랬는지 수업이 지리멸렬했다. 나는 그때 지식이 많다고 강의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
오후에 다시 도서관에 와서 공부하다가 5시 30분부터는 야간수업을 받았다. 학교는 졸업이 목표였다. 출석률은 70%에 맞추었다. 70%를 출석하지 않으면 아무리 시험을 잘 봐도 교수님이 F학점을 주었기 때문에 출석은 무조건 70% 넘어야 했다. 학점은 좋지 않았다. 대부분 D였다.
시험을 못 본 것은 아니었다. 공무원 시험과 중복되는 과목들이어서 답안 작성은 그럴듯하게 했다. 다만 교수님은 출석도 제대로 하지 않는 나에게 후한 학점은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학교 졸업장을 위해 그 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학점은 공무원 시험을 하는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학 야간 수업은 밤 10시에 끝났다. 수업을 끝나면 다시 도서관에 가서 마지막 공무원 시험 정리를 하고 2시에 취침을 했다. 평일에는 도서관 안에서 이불을 펴고 누워서 잤지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기간에는 중고생 학생들이 도서관을 다람쥐처럼 우르르 찾아왔다. 학생들은 시끄럽게 떠들기도 했고 누울 자리도 없어서 나는 도서관 책장에 엎드려 쪽잠을 자야만 했다. 그런 날은 머릿속이 푸르른 멍이 들고는 했었다.
그해 화공직 7급 시험은 보기 좋게 낙방을 했었다. 첫 번째는 수험기간 부족이었고 두 번째는 실력 부재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어이없게도 김영삼 정부의 작은 정부 실천이라는 국정지표가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후 작은 정부를 내세우면서 그해 공무원 신규 임용을 반으로 줄였다. 안타까웠던 것은 결국 임기 말기에는 초기의 국정지표와는 달리 슬립 정부가 아닌 비대 정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국가직과 지방직 9급 시험에는 합격할 수 있었다. 국가직은 국방부였고, 지방직은 경기도였다. 국가직인 국방부 먼저 인사발령이 났다. 국방부는 서울의 중심인 용산에 있었고 복지가 좋았다. 서울 근무를 보장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앗다. 군인공제회나 새마을금고에 저리로 대출도 받을 수 있어서 서울에 전세를 살 수 있었다. 국방부는 결혼을 해서도 제법 넓은 아파트도 5년간 거의 공짜로 기거할 수 있는 수혜를 주었다.
그렇게 나는 군대를 졸업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공직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다섯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