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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여울 Oct 17. 2023

TWG 차(茶) 황금색 테이크아웃 컵 때문에

견물생심(見物生心)

페이스북에서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차(茶) 브랜드 TWG의 최근 게시물을 보았다. 10월 한 달 동안 오차드로드에 있는 다카시마야 백화점 매장에서 주말을 제외한 평일에 테이크아웃 하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차 한 잔을 사면 무료로 한 잔을 더 주는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다. 인터넷상의 반응 뜨거웠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이벤트 참여 후기 중에는 차를 주문하고 받는데 2시간쯤 걸렸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도 TWG 차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무료로 차 1잔을 더 받기 위해 2시간 가까이 기다리는 건 엄청난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


며칠 전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빵을 사려고 잠시 다카시마야 백화점에 들렀다. 지하 2층 식품관으로 바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고팠던 터라 우선 쌀국수 한 그릇을 먹었다. 빵집으로 슬슬 걸어가는데 오른편에 길게 늘어진 대기줄이 보였다. 궁금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저 앞에 TWG 매장이 보였다. ‘아하, 여기구나. TWG 1+1 행사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페이스북에서 본 TWG 이벤트가 생각났다. 대기줄은 하나가 아니었다. 1차 대기줄과 2차 대기줄로 나눠져 있었고 벨트 차단봉으로 출입방향을 유도해 놓았다. 대기줄 출입구에는 직원들이 안내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대기줄, 1차 대기줄이다.


황금색 컵이 잔뜩 쌓여 있어서 눈이 부셨다.


‘오, 저 황금색 컵 너무 블링블링한데? 집에 두고 계속 써도 되겠다. 캐리어도 진짜 예쁘다... 보자, 오늘 아이들도 남편도 집에 없고, 모처럼 나도 시내에 나왔으니 줄 서서 아이스티 두 잔 받아 볼까? 2시간쯤이야 브런치 글 읽으면서 댓글도 쓰고, 읽고 있던 전자책 보면 금세 지나가잖아. 그래, 그럼 내 인생 처음으로 1+1 아이스티 받으려고 줄 한번 서 보자.’ 출입구에서 잠시 서성이고 있으니 안내하는 직원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손님, 주문하고 픽업하는 데 대략 1시간 반에서 2시간 걸리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그렇게 오래 걸리나요?”

“네, 한 명당 주문수량 제한이 없어서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오늘 차 말고도 주는 게 있나요?”

“유리로 된 재활용 빨대와 설탕 스틱이 있어요.”


긴 기다림 끝에 차를 산 사람들은 황금색 블링블링한 컵 2개가 들어있는 노란 캐리어를 들고 나왔다. 어느새 나도 홀린 듯이 줄을 섰다. 종이 메뉴판을 받았다. 테이크아웃이 되는 차는 70여 종류가 있었다. 평소에 잘 마시는 차 몇 종류가 메뉴판에 있어서 더 볼 필요가 없었다. 브런치 앱에 들어갔다. 관심작가님들의 글을 읽고 댓글을 썼다. 밀리의 서재 앱을 열었다. 내 서재에 넣어 둔 김이나 작가님의 <보통의 언어들>을 펼쳤다. 따스하고 섬세한 작가의 시선으로 쓰인 글이 참 좋았다. 시간이 금세 흘렀다. 별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어서 그런지 다리가 조금씩 아파왔다.


1시간쯤 지났다. 바로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차를 주문하러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음이 내 차례였다. 매장 앞쪽에서는 티 마스터가 얼음이 잔뜩 담긴 황금색 컵에 갓 우려낸 차를 연신 붓고 있었다. 밀려드는 주문에 그는 잠시도 쉴 새 없 보였다. ‘아, 이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1잔만 주문하기 아깝지 않아? 저 블링블링한 컵도 몇 개 가지고 싶은데. 그냥 2잔 주문할까? 그럼 무료로 2잔 더 받을 수 있는데.’ 서서 고민하는 사이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주문대로 갔다. “실버문 하나, 게이샤블러썸 하나, 1837 하나, 크렘브륄레 하나, 모두 아이스티로 만들어 주세요.” 결국 2잔을 주문하고 무료로 2잔 더 주문했다. 아이스티 4잔에 총 $17(약 16800원)을 지불했다. 40분쯤 더 기다린 후에야 주문한 아이스티를 받았다.


티 마스터가 쉴 새 없이 아이스티를 만들고 있다. 현장에서 갓 우린 차를 얼음이 잔뜩 들어있는 황금색 컵에 부었다.


아이스티 4잔을 받았다. 2잔 전용 캐리어 두 개에 넣어 주었다.


‘그나저나 오늘 자동차를 안 가져왔는데 어떡하지? 여기서 혼자 다 마시고 갈 수도 없고. 그냥 택시 타고 집에 빨리 가야겠다.’ 컵이 잘 고정되어 있으니 별 문제없을 것 같았다. 집에 가서 시원한 아이스티 마시며 일할 생각에 마냥 기분이 좋았다. 택시를 탄 후 5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바지 윗부분이 조금 젖는 느낌이 들었다. ‘어, 왜 이러지? 이상하다. 아이스티가 새나?’ 분명 매장에서는 컵에 뚜껑을 잘 닫아서 캐리어에 넣어 줬는데...'


마침 가방에 민소매 면티 2장이 있었다. 모두 꺼내 캐리어 아래에 깔았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아이스티가 조금씩 샜다. 양손에 힘을 더 주었다. 바지 윗부분이 조금 더 젖었다. 티셔츠도 살짝 젖었다. 나는 너무너무 당황했다. 혹시라도 뒷좌석 시트 흘릴까 봐 안간힘을 다 해 컵을 잡다. 15분쯤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뒷좌석을 확인했다. 온몸으로 막은 덕분에 시트는 깨끗했다. 휴, 진짜 다행이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캐리어에서 컵을 모두 다. ‘아뿔싸, 이럴 수가!’ 아이스티는 플라스틱컵이 아닌 종이컵에 담겨 있었다. 내 눈에는 왜 그 황금색 컵이 플라스틱컵으로 보였는지 모르겠다. 종이컵은 굉장히 단단했다. 물에 잘 젖는 재질도 아니었다. 실제로 다음 날까지 냉장고에 뒀는데도 종이컵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바로 내 행동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스티가 분명히 단단한 플라스틱컵에 담겨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양손에 너무 힘을 주어 잡았다. 종이컵 형태가 약간 일그러지면서 아이스티가 샌 것이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네. 내가 양손에 너무 힘을 주고 잡았네...” 찬 음료는 플라스틱컵에 담아 준다고 생각한 내 고정관념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같은 디자인의 텀블러를 판매했다면 나는 분명 텀블러를 샀을 것이다. 다 마신 종이컵은 현재 볼펜꽂이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내가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린 건 TWG 티 1+1보다 블링블링한 황금색 컵에 마음을 더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겹겹이 잔뜩 쌓여 있는 황금색 컵은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컵이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했다. 컵에 관심 있었다면 미리 입구에서 확인했어야 했다. 기다린 게 아깝다고 1잔 더 주문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이스티 2잔만 가지고 택시를 탔다면 그토록 감당하기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료수를 가지고 택시를 타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다짐했다.


내 인생 처음으로 2시간 가까이 줄 서서 1+1 아이스티를 받고, 그걸 또 노심초사하며 집에 가져온 걸 생각하니 웃음이 피식 나왔다. 어렵게 가져온 아이스티인데 얼른 맛보고 싶었다. 컵뚜껑을 다 열었다. 향긋한 차내음이 퍼졌다. 늘 따뜻한 차로만 마셨는데 시원한 아이스티로 마셔도 풍미가 떨어지지 않고 맛이 좋았다. 무료로 받은 유리 빨대도 꽤 예뻤다. 설탕 스틱은 서랍에 넣어 두었다. 목이 말라 아이스티 1잔을 그 자리에서 다 마셔 버렸다. 젖은 옷은 세탁기에 넣었다. 남은 아이스티 3잔은 냉장고에 넣어 두고 다음 날까지 마셨다. 여전히 향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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