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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Jan 13. 2023

첫 회사에서 연봉 사기를 당했다

어른 실격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아니, "인간 실격"이라기엔 너무 가혹한가? '어른 실격' 정도면 어떨까? 좋다, 그럼 "부끄럼 많은 어른이었습니다."


나는 참 세상 물정을 몰랐다.

세상 물정 모른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도 몰랐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월급이 얼마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은 그런 거 몰라도 돼."라고 눈을 부라리며 대답하셨고, 정말로 그런가 보다 믿고 자랐다. '그런 거'라는 말에는 범접할 수 없고, 범접해서도 안 되는 영역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돈에 관심을 보이면 혼나는구나,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십 년을 한 직장에 다니셨던 아버지는 야근에 접대에 언제나 지치고 화가 나 계신 듯했지만 그래도 하루를 쉬지 않고 회사에 나가셨다. 성실하게 일하며 받은 월급을 아껴 쓰는 것이 어린 내가 아는 '어른'의 세상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성숙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아버지 회사에서는 자녀 장학금이 지원되었는데 일정 학점 이상을 받아야만 했다. 공부하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생각에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공부라는 것이 온통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느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느니 "브람스를 좋아하"느니 하는 책들을 탐독하는 것이었다.

그 세계에서 역시 '돈'을 좇는 것은 언제나 배덕이었고 그 끝은 파멸이었다. 그렇게 나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20대를 보냈다.




그리고 첫 회사에서 연봉 사기를 당했다.

그다지 호기롭게 희망 연봉을 써내지도 못했다. 당시 출판사는 문학 전공자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직장처럼 여겨졌다. 좋아하는 책과 관련된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박봉이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가서 열심히 하면 연봉은 언제든 오를 거라 믿었다. 백면서생이었던 나의 작디작은 세계에서는 그랬다.


처음으로 면접을 본 회사였다.

온통 경력자만 찾는 출판계에서, 신입사원을 뽑는 회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희망 연봉을 보고 면접관이 허허 웃었다. "그래, 희망하는 대로 줄 테니 어디 열심히 해 봐요."라고 했다. 아직도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첫 월급을 받았는데 터무니없는 숫자가 찍혀 있었다.

주겠노라 했던 연봉보다 600만 원이 적었다. 용기를 내어 사장을 찾아갔더니 수습 기간이라 그렇다 했다. 정식 사원이 되면 희망 연봉을 주겠다 덧붙였다. 수습 기간이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내가 편집 업무에 대해서 뭘 안다고, 한 사람 몫도 못하는 주제에, 일단 열심히 배우자 생각했다.

3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입금된 금액은 이전 달과 동일했다. 다시 사장을 찾아갔다. 근로계약서를 쓰고 나면 제대로 줄 테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때서야 내가 계약서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약서는 차월피월 미루어졌고, 나는 반쯤 포기한 채 일 년만 버티자 결심했다. 일 년도 안 되어 첫 직장을 그만둔 신입사원을 어느 회사에서 써 주겠느냐 싶었다.


그렇게 나는 책 만드는 회사에서 책 밖의 날 서린 세상을 경험했다.

이제 막 사회에 한 발 내디딘 신입사원의 연봉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회사가 다른 것에서는 오죽했을까. 버티고 버티다 입사 6개월쯤 되던 어느 날, 책 한 권을 건네받았다.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 번역자와 어느 출판사의 이름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책이었다. "번역 한번 해 봐." 네? 저한테 번역을 맡겨 주신다고요? 힘들어도 버틴 보람이 있나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말귀도 못 알아듣느냐는 듯 짜증을 냈다. "아니, 무슨 말인지 몰라? 조사랑 표현 같은 거 살짝만 바꿔서 다시 출간한다고." 남의 번역을 훔쳐서 출간하겠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나는 연봉 사기를 당한 첫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 회사는 업계에서도 악명이 높은 곳이었다.

훗날 선배들에게 들은 후에야 알았다. "어쩌다 그런 곳엘 갔어요?"라는 질문에 아무 말도   없었다. 알았으면 가지 않았겠지. 업계 정보나 회사 평판을 공유하는 플랫폼이 없던 시절이었다.




참으로 순진하기 그지없는 20대였다.

아이의 순진함은 순수함의 유의어지만 성인의 순진함은 어리석음의 유의어가 아닐까. 불쾌함과 후회가 필연적으로 따르는, 그리하여 자괴감을 남기는 어리석음.

이후로도 몇 번의 이직을 더 했다. 첫 회사에서의 경험을 교훈 삼아 이직을 연봉 인상의 기회로 삼았다. 회사 그 자체보다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요조와는 달리 "부끄럼 많은 내 생"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덕분에 매번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갔고, 내 일에 만족하는 썩 여문 편집자가 될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세상 물정을 알아 가는 중이다.

하지만 크게 변한 것은 없다. 어린 시절 생각했던 '어른'의 이미지 그대로, 노동의 대가로 번 돈을 아껴 쓰며 살고 있다. 부자가 되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래서 가슴속에 로또 한두 장 정도는 품고 살지만, 여태 다른 길은 가 보지 못했다. 주식이나 부동산, 코인 같은 세상은 내게 판타지 속 세상보다도 낯설고 기이하다. 그런 세상에 발을 잘못 들였다가는 '친구 1'도 못해 보고 첫 장에서 사망하는 캐릭터가 될 것 같다. 내게 있어 그쪽 세상의 장르는 리얼리즘이 아닌 아포칼립스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포칼립스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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