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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Jan 26. 2023

수육엔 커피 한 스푼

남편의 집밥

명절이었다. 말레이시아에 온 이후 명절은 의미가 없어졌다. 주말이나 공휴일과 다를 것 없는 하루다. 그런데 머리가, 마음이, 몸이 저마다의 습관에 따라 명절을 기억한다.


한국의 연휴는 언제까지인지 확인을 하고 달력에 표시해 둔다. 잘 지내시나요, 못 가 뵈어서 죄송해요, 건강하세요, 몇 년째 보이스톡으로 똑같은 안부를 묻고 인사를 전한다. 한반도를 종으로 횡으로 몇 시간씩 이동하지 않아도 됨에, 없는 솜씨로 무리해서 명절 음식을 차려 내지 않아도 됨에 안도하면서도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국 땅에서 보내는 명절은 지긋한 듯 그립고 외로운 듯 홀가분하다. 그리움과 홀가분함 사이로 미처 떨치지 못한 해묵은 후회와 죄책감과 화가 아직도 한데 뒤엉겨 있다. 명절이면 전을 부치시던 어머니 옆에 앉아 냉큼 집어 먹던 뜨거운 전 한 점은 세상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지만, 그 기름진 맛과 냄새와 함께 들이켜던 공기는 너무나도 무거웠다. 진득한 공기가 혈관 구석구석을 흐르다 숨이 턱 막히곤 했다. 친척 어른들이 쥐어 주시던 용돈 몇 푼 받지 않아도 좋으니 이런 날은 사라지면 좋겠다고 되뇌던 어린 마음이 나의 명절이었다.




명절에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고 남편과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은, 아직도 떨치지 못하는 그 시절 어린 마음에 대한 위로다.


이번 설 연휴엔 남편이 수육을 삶았다. 수육은 갈비찜이나 전에 비해 손이 덜 가서 좋다. 큰 힘, 많은 재료 들이지 않아도 그럴듯하게 푸짐한 상을 차려 낼 수 있다. 잡내를 잡겠다며 월계수나 양파, 파 같은 갖은 재료를 넣지도 않았다. 냉장고를 열어 보았으나 상추나 깻잎은커녕 배추조차 없다. 남편은 손질된 통삼겹살에 물을 붓고 인스턴트커피 가루 한 스푼, 된장 한 스푼, 후추를 조금 넣는다. 주방을 어슬렁거리며 "뭐라도 할까?" 슬쩍 물어보지만 남편은 나를 쫓아낸다. 어차피 고기 삶는 동안 할 일도 없다며 마늘과 고추를 씻어 썰고, 즉석에서 무생채를 만든다. "무생채 말고 그거 해 줘, 보쌈 시키면 주는 꼬들꼬들한 무김치."라고 했더니 "그거 만들 때 설탕 엄청 들어가."란다. 남편은 뭐라고 말해야 내가 금방 물러날지 너무 잘 안다.



술값이 비싼 무슬림 국가에서 거의 유일하게 주류 할인을 하는 것도 설날이다. 수육과 에델바이스.



수육을 만들 때 커피 한 스푼을 넣는 것은 우리 엄마의 레시피다. 요리 솜씨가 좋으셨던 어머니는 친정에 갈 때마다 정성으로 음식을 만들어 주셨다. 요리에 서툰 딸이 내심 걱정스러우셨는지 슬쩍 조리법을 흘리듯 일러 주시곤 했다. "수육을 만들 땐 다른 거 말고 인스턴트커피 한 스푼만 넣어도 잡내가 안 나."라든가 "김치찌개를 끓일 땐 된장 한 숟가락, 된장찌개를 끓일 땐 고추장 한 숟가락."이라든가 "감자전 반죽에 달걀 하나만 넣어 봐." 하는 식이었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대충 고개만 주억거렸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곧잘 새겨들었던가 보다. 수육을 내오며 자랑스럽게 말한다. "어머니 레시피대로 커피 한 스푼 넣었어."


식기 전에 얼른 내어오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뜨거운 고기를 써느라 애를 먹었는지 수육은 전문점에서 먹을 때처럼 얇고 보들보들하지가 않다. 뭉텅뭉텅 되는 대로 썰어 낸 큼지막한 고기가 어설프고 정답다.  

어머니 레시피대로 남편이 만든 수육이다. 한 점 먹을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가 생각나면 언제나 그렇듯 조금은 쓸쓸하고, 조금은 외롭고, 조금은 우울하다. 그래도 이만하면 썩 나쁘지 않다. 남편과 술잔을 부딪친다. 이만하면 썩 행복한 명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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