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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Jun 20. 2023

미음, 마음

남편의 집밥

2023년 상반기,

2종의 책을 번역하고, 3종의 책을 편집하고, 3종의 책을 검토했다.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제 막 자리를 잡아 가기 시작하는 시기였고 욕심이 나는 책들이었으며 새로운 거래처를 뚫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를 소개하고 또 일을 맡겨 주는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었고 좋은 결과물로 인정받고 싶었다.


2023년 상반기,

폭염이 동남아시아를 덮쳤다. 비는 오지 않는데 체감온도는 연일 40도를 웃돌았다.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만 있으니까. 너무 더워 운동을 하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허리가 아팠지만, 폭염이 지나가면 다시 산책을 나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아이 아침을 준비하고 간식과 도시락을 싼 후 집 안 정리를 대충 했다. 아침 8시면 일을 시작했다. 마침 한국 시각도 9시, 딱 업무 시작 시간이었다. 아침식사와 점심식사는 컴퓨터 앞에 앉아 삶은 달걀이나 토스트, 간장계란밥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그나마 틈틈이 빨래를 널고 개고 청소기를 돌리고 저녁을 준비하느라 몸을 움직였다. 저녁식사 뒷정리까지 하고 나면 녹초가 되었다. 10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읽다 만 책은 반년 넘게 그대로였고 브런치에 글을 쓸 여력도 없었다. 하루 평균 작업 8시간, 수면 8시간, 집안일 4시간. 연장근무도 없고 출퇴근도 하지 않고 소모적인 감정노동도 없으니 업무 환경이며 생활 방식이며 거의 완벽하다 할 만했다.


그런데도 병이 나 버렸다.

지독한 감기몸살이 한 번 찾아왔고, 겪어 보지 못했을 만큼 무지막지한 복통이 두 번 있었다. 하필 그중 한 번은 위치가 오른쪽이어서 오밤중에 맹장이 터진 것 아니냐며 겁을 집어먹었다. 결국 맹장은 아니었지만 이때의 경험이 너무도 아찔하여 한국에 들어가면 맹장을 떼어 버리고 오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정밀검사를 하지 않아 복통의 원인은 아직도 모른다. 급하게 찾은 동네 병원에서 피 검사를 해 보았지만 염증 수치도 괜찮았다. 그런데 의사는 헤모글로빈 수치를 보고 깜짝 놀라 빈혈이 심하다고, 그래서 이렇게 안색도 창백하고 피곤에 절어 보이는 거라며(물론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말하진 않았던 것 같다.) 검사를 제대로 받아 보라고 했다. 하지만 내 빈혈은 고등학생 때부터 함께한 것이었다. 그것도 헌혈을 하겠다고 찾아간 곳에서 '너 같은 피는 받을 수 없단다'라고 거부당해서 알게 되었다. 그 후론 잊고 살았다. 빈혈이며 저혈압이며 관절통이며 고혈압이며 고지혈증이며,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옆에 두고 어르고 달래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 말이다.


복통 역시 내 고질병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툭하면 배가 아파 양호실을 들락거렸다. 5학년인가 6학년 때쯤 엄마 손에 이끌려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아 봤지만, 의사는 원인이 없다고 했다. "신경성인 것 같네요." 그뿐이었다. 열 살 어린아이가 신경성 복통이라니.




초예민한 딸자식 덕분에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미음을 자주 쑤어 주셨다. 뽀얗고 뜨거운 흰쌀죽. 불린 쌀을 참기름에 볶다가 물을 부어 약불에서 한참을 저어 가며 만드셨다. 다른 재료는 전혀 없지만, 정성만큼은 어느 음식도 따라오지 못할 한 끼 식사였다. 탈이 날까 김치 한 조각 함께 먹을 수 없는 딸을 위해, 간장에 참기름을 섞고 깨를 송송 부어서 종지에 담아 주셨다. 쌀죽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면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과 함께 온몸이 따뜻해졌다. 배가 진정되면서 마음도 편안해졌다. 밥을 다 먹고 나면 가끔 엄마 손은 약손, 하시며 배를 쓰다듬어 주셨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기억에 뿌리내린 소중한 추억이다.


그래서일까, 전자레인지에 3분 돌리기만 하면 되는 인스턴트 죽을 어디서나 쉽게 살 수 있고, 낙지며 굴이며 전복이며 온갖 재료가 푸짐하게 들어간 고급 죽도 금세 주문해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내 딸아이 미음만큼은 나도 직접 끓인다. 어머니가 그랬듯, 딸에게도 참기름을 넣은 간장 종지를 함께 차려 낸다. 내 어머니에겐 죽 한 그릇 제대로 끓여 드리지 못했음을 아파하면서.




2023년 상반기,

원인 모를 두 번의 복통을 겪는 동안, 남편이 내게 미음을 쑤어 주었다. 나 같으면 한솥 가득 끓여 놨다 데워 줬을 텐데, 남편은 그렇게 하면 맛없다며 매끼 새로 만들었다. 더위도 많이 타는 사람이 에어컨 없는 부엌에서 땀을 흘려 가며.

나의 어머니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남편으로 이어진 고맙고 소중한 미음 한 그릇. 돌아서면 금세 또 아웅다웅할 남편이지만, 그럴 때면 한번쯤 꺼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미음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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