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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Jun 21. 2023

인간 외의 타임머신은 없다

2023 인터내셔널 부커상 수상작, <타임 셸터>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Georgi Gospodinov), 타임 셸터(TIME SHELTER)


21세기, 전 세계는 팬데믹에 빠졌다. 코로나? 아니다. 사람들은 기억을 잃어 가고 있다.

과거를 잃자 현재와 미래에 불안을 느낀 여러 국가들은 과감한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은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인류를 또 다른 종말로 이끌 것인가?


기발한 상상력에 장르소설의 재미, 유머와 감동, 사유와 담론의 기회까지 

이 짧은 소설에 모두 담겨 있다.

밑줄 그어 가며 읽을 만한 인상적인 구절들이 차고 흘러넘친다. 

오랜만의 만족스러운 독서(외서 검토 업무).



* 이하 번역문의 저작권은 저에게 있습니다. 인용하실 때엔 출처를 밝혀 주세요.



2부 1


그리하여 과거가 세계를 잠식했다. 

과거는 전염병처럼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퍼졌다. 꼭 스페인 독감 같았다. 자네, 1918년 스페인 독감 기억하나? 가우스틴이 물었다. 들어서 알죠. 나는 대답했다. 끔찍했지. 가우스틴이 말했다. 사람들이 길을 가다 픽픽 쓰러져서 죽었어. 무엇을 통해서든 감염될 수 있었지. “별일 없어?” 하고 인사를 나눈 다음 날 저녁에, 죽어 버리는 거야. 

그렇다. 과거는 전염되었다. 전염은 어디에서나 일어났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무서운 부분은 아니었다. 가장 무서운 점은, 면역 체계를 무너뜨리는 돌연변이가 급속도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20세기에 몇 차례 심각한 위기를 겪은 유럽은 특정 대상에 대한 집착이나 국가 차원의 광기에 대한 면역력을 키웠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먼저 항복했다.

물론 아무도 죽지 않았다.(적어도 초기엔 그랬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퍼져 나가고 있었다. 공기를 통해 확산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누군가 크게 소리치면서 침을 튀기면 독일(혹은 프랑스나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로 바이러스를 보낼 수 있는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어쨌든 바이러스는 눈과 귀를 통해 빠르게 전염되었다.  

팬데믹 초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전통 의상 차림으로 외출하기 시작했다. 몇몇 웹사이트에서는 이를 조롱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도 약했다. 대중의 행복에 대한 공격처럼 취급받자 그들마저 곧 입을 다물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재연하는 삶이. 





인상적인 구절들


시간을 막을 수 있는 방독면이나 방공호는 아직 그 누구도 개발하지 못했다. 


1939년 9월 1일 이른 아침,
인간의 시간이 끝났다. 


그러니 나를 믿어. 언젠가, 머지않아, 사람들 대부분 자신이 선택한 과거로 돌아가기 시작할 거야. 그들의 의지로 기억을 ‘잃을’ 거란 말이야.  


과거는 일어난 일만이 아니다.
때론 당신이 그저 상상했던 것이기도 하다.  


현대 소설에서 괴물은 자취를 감추었고 영웅 역시 사라졌다. 괴물이 없으면 영웅도 없는 법이다. 그러나 괴물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 모두를 쫓는 괴물이 하나 있다. 당신은 그 괴물이 죽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 물론이다. 하지만 죽음은 그 괴물의 형제이다. 괴물은, 노화다. 이야말로 진정한(그리고 불운한) 전투이다. 함성도 불꽃도 성 베드로의 검도 없는, 마법의 갑옷도 동맹도 없는, 의례를 갖추어 당신을 노래하는 음유시인도 희망도 없는 전쟁인 것이다.  


사실 우리 몸은 꽤나 자비롭게 빚어졌다. 최후에는 망각에 이르니 말이다. 떠나가는 기억은 우리를 옛 공터로 데려다준다. 거리에서 뛰어놀며 “오 분만 더요!”라고 엄마에게 외치던 어린 시절로 말이다.  


로테, 너라면 어느 시대를 선택할 거야? 1960년대? 1970년대? 아니면 1980년대?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곧 그런 질문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답은 하나라는 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 모든 시대에서 열두 살이고 싶어.
나의 대답 역시 똑같았을 것이다.  


나를 아이로 기억하던 마지막 사람이 이제 떠났네.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제야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세상의 종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종말이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인류세人類世.
인간을 위해 처음 이름 붙여진 이 시대는 결국 인간의 마지막 시대가 될 것이다. 


소설의 끝은 세상의 끝과도 같다. 미루면 미룰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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