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씨를 뿌려 초여름에 모종 했던 오이넝쿨이 막대기로 기둥을 받쳐줄 만큼 뻗었었다. 한여름, 야채값이 치솟을 때도 오이넝쿨에 맺힌 오이는 주인의 밥상만은 풍성하게 챙겨주었었다. 싱싱한 모습과 향긋한 냄새로 입맛을 돋우어 주었던 오이넝쿨이 가을이 되자 시들거린다. 잎사귀며 줄기며 말라비틀어지고 힘없이 떨궈지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말라서 떨궈진 잎사귀 사이로 새끼손가락만 한 애기오이들이 여기저기 맺혀있다. 크지도 못하고 말라버릴 애기오이들을 보니 마음이 짠하게 시려온다.
머지않아 텃밭에서 치워질 오이넝쿨, 가을이 되면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친정집뒤안길 담장을 대신한 대나무숲이다. 가을이 오면 대나무잎사귀가 말라 떨어져 마당을 어지럽힌다. 어머니는 저놈의 잎사귀들 때문에 마당을 쓸고 또 쓸어도 어지럽혀진다고 성화를 내신다. 찬란했던 식물들이 가을과 함께 힘을 잃는 모습을 보며 늙어가는 내 모습과 오버랩되어 슬픈 감정이 몰려온다.
나름의 텃밭에서 한 때는 만족하거나 무언가를 희망하며 찬란히 살아갈 힘이 있었던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흘러가버린 시간 속에 늙음이라는 인생의 계절을 맞이했으니 어쩌란 말인가! 그저 슬픔만이 안개처럼 마음 언저리를 메울뿐이다.
치매 걸린 어르신들을 돌보는 요양원에 아버님을 모시고 매주마다 한두 번씩 문안하는 대학 후배는 문안하고 돌아갈 적마다 훌쩍거리며 전화를 한다.
"언니, 나 너무 슬퍼! 몸도 마음도 지쳤어. 하지만 내 아버지가 나를 몰라보는 게 너무 슬프고, 아버지가 저렇게 되신 게 더욱 슬퍼.... 흑흑흑"
후배는 자신의 아버지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날이 오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두렵고 암담하단다. 왜 아니겠나. 나도 늘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올 가을엔 더욱 내 인생의 계절도 가을의 문턱에 걸쳐있음을 실감한다.
가을을 즐기는 이들도 많은데 가을을 왜 슬프게만 받아들이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지금 내 마음이 가을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60세 환갑을 넘긴 베이비부머 세대 선배님들이 내 주변에 많다. 대학졸업 후 한 직장에 올인해서 정년을 채우고 은퇴한 선배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업한다고 창업과 폐업을 반복했던 한 선배는 환갑을 넘어 경제적 빈곤과 가정파탄으로 고독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한심한 사람으로 일축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희망이 있다. 찬란했던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그가 바라는 희망은, 경제적 회복이 먼저 이뤄지길 바라고, 다음으론 가정의 회복-한 때는 사랑했던, 연인이었던 아내와의 재회-, 그리고 그녀와의 사랑의 결실인 자녀와의 관계회복이란다. 마지막 남은 이 한가지 희망이 있기에 삶의 끈을 간신히 붙잡고 있단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한가닥 남은 희망의 끈이 무심하게 져버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