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해설: 흰샘]
조선 후기 문신이자 시인인 삼명(三溟) 강준흠(姜浚欽, 1758~1833)이 1796년 여름에 지은 시이다. 그해 여름도 무척 더웠던 모양이다. 대책이 있겠는가? 궁궐에서 벼슬하는 처지라 피서를 갈 수도 없고, 더위를 쫓는 유일한 방법은 부채질뿐이다. 그냥 부채질도 아니라 ‘분노의 부채질’을 종일 해댔으니 부채인들 온전하겠는가? 종이는 너덜너덜, 부챗살은 덜렁덜렁해졌다. 집에서는 아예 불을 때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정작 불은 속에서 일어난다. 선비의 책무이자 즐거움인 독서로 더위를 잊어보려 책상 앞에 앉아 보지만 한순간도 붙어 있을 수 없다.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양반 체통도 잊어버리고 종일 앉았다 일어났다 자발을 떠는 모습이 눈에 본 듯 선하다.
아직 장마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열대야가 시작되었다. 24도와 26도는 하늘과 땅 차이다. 25도를 기점으로 그렇게 느낌이 다르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요즘처럼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었던 시절의 무더위는 그야말로 대책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열섬현상’이나 ‘기후위기’니 하는 용어는 없던 시절이었다. 웬만하면 에어컨 대신 선풍기로, 선풍기 대신 부채로 버텨볼 생각을 한다.
강준흠은 정조의 총애를 받는 초계문신(抄啟文臣)이었으며, 다산 정약용과고 멀지 않은 인척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를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이른바 공서파(攻西派)의 핵심 인물로 나중에는 다산과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본인도 평생 정치적으로 수많은 부침(浮沈)을 겼었다. 나는 이 사람의 문학으로 학위를 했으니 내게는 소중한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