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말을 걸다

『눈물상자』 (한강 글, 봄로야 그림, 문학동네, 2008)

by 책읽는아이린

“내가 찾고 있는 건 순수한 눈물이야.”


지인의 추천으로 한강의 『눈물상자』를 읽었다. 제목부터 내 마음을 울렸다. ‘눈물’이라는 단어 속엔 이미 인간의 연약함, 정직함, 그리고 살아 있음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그 앞에 ‘상자’가 붙는 순간, 어떤 차가운 이미지가 덧입혀진다. 감정이 포장되고, 거래되고, 보관되는 시대의 비유처럼 느껴졌다.


이야기는 눈물을 잘 흘리는 아이와 눈물을 모아 파는 아저씨로부터 시작된다. 그 아저씨는 눈물을 보석처럼 결정체로 만들어 색깔별로 구분하며 모은다. 눈물의 색은 모두 다르다 - 연보랏빛 눈물은 잘못을 후회할 때 흘리는 눈물, 검붉은 눈물은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할 때 흘리는 눈물, 분홍빛 눈물은 기쁨에 겨워 흘리는 눈물, 연한 인두색 눈물은 아기들의 눈물… 그러나 그가 오랫동안 찾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순수한 눈물’이다.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면서 흘리는,

특별한 이유가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이유로 인해 흘리는 눈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물이란다.”



그 말이 내 가슴에 오래 남았다. 그 눈물은 계산되지 않은 감정, 이해나 목적을 초월한 인간의 본질이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문득 생각했다. 지금의 우리는 얼마나 ‘순수하게’ 울 수 있을까? 눈물은 감정의 언어이지만, 우리는 그 언어를 잃어가고 있다.


사회는 ‘감정의 절제’를 미덕으로 가르치고, 효율과 생산성은 눈물의 자리를 빼앗았다. 슬픔은 불필요한 감정으로, 눈물은 약함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눈물 대신 이모티콘을, 한숨 대신 웃는 표정을 선택한다. 감정이 삭제된 사회 속에서 인간은 점점 더 기능적인 존재로 변해간다. 그럴수록 『눈물상자』의 한 장면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평생 울지 못한 한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그는 아저씨에게서 눈물을 사 마신 뒤, 마침내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아내를 떠나보냈을 때, 그 모든 순간에 억눌려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그는 울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영혼을 물로 씻어낸 기분이구나.
그 모든 걸 겪어낸 내가 얼마나 장한 사람이었는지 이제야 알겠어.”


그 장면은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서비스직으로 일하던 시절, 나는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웃음은 의무였다. 내 마음은 울고 있었지만, 얼굴은 늘 미소를 유지해야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감정을 연기하는 사람 같았다. 감정이 통제된 삶은 효율적이었지만, 동시에 공허했다.


눈물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슬픔을 잃는 게 아니다. 그건 자신의 내면을 감지하는 능력, 즉 ‘살아 있음’을 느끼는 감각을 잃는 것이다. 눈물은 감정의 끝이 아니라, 감정의 회복이다. 눈물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경계를 확인하고, 타인의 고통에 다가선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


요즘 나는 글을 쓴다. 글은 내 안의 눈물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었다. 글을 쓰며 나는 마음의 강둑을 조금씩 복원한다. 감정이 무너지면 삶이 흔들리지만, 감정을 표현하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보도블록 틈의 새순에서도 마음이 흔들린다. 그것은 연약함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증거다.


『눈물상자』는 결국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감정을 잃은 사회에서 인간은 기능만 남는다. 그러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인간은 여전히 ‘느끼는 존재’로 남는다. 눈물은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다. 그 시선을 되찾는 순간, 우리는 다시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온다.



#한강 #눈물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