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다니엘 살미에리 글 그림, 북극곰, 2018)
산책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집어 든 책이다. 산책을 좋아하는 나는 표지에 그려진 곰과 늑대를 보며, 이 둘은 어떤 산책을 할까 궁금해졌다. 색연필로 그린 곰과 늑대의 털은 유난히 부드럽게 보인다. 눈매 또한 순하다. 그 표정만으로도 이 책의 결이 느껴진다. 겉표지를 넘기자 면지에 눈발이 날리고 있다.
어느 고요한 겨울밤, 산책을 나온 새끼 곰과 새끼 늑대는 눈밭에서 서로를 만나 함께 걷기 시작한다. 고요한 숲과 눈 밟는 소리를 좋아한다는 둘은 숲을 지나 얼어붙은 호수에 이른다. 얼음 아래 잠든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자연의 깊은 고요와 경이를 마주한다. 짧은 산책 끝에 둘은 각자의 겨울로 돌아가지만, 계절이 바뀌어 봄이 오고 숲이 깨어날 즈음, 곰은 흔들리는 수풀 사이에서 누군가를 발견한다. 그다음 이야기는 책이 독자에게 건넨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숲을 지나 예상하지 못한 풍경과 마주하는 순간이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얼음 들판. 곰과 늑대는 호수 한가운데까지 걸어간다. 그리고 얼음 아래를 내려다본다. 곰이 앞발로 눈을 쓸자, 얼음 밑에서 반쯤 잠든 물고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을 바라보는 곰과 늑대의 얼굴에는 계산도 경계도 없다. 순수한 놀람만 있다. 어느 장소에 갔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장면을 마주하며 마음속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곰과 늑대도 자연의 그런 경이를 느꼈을까.
산책이 끝나면 길은 사라지지만, 함께 보았던 장면은 오래 남는다.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도, 어느 날 문득 눈 밟는 소리나 얼음 아래의 푸른 기척 같은 것이 마음속에서 불쑥 되살아난다. 그렇게 기억 속에서 이어지는 산책이 있다. 다시 만나지 않아도, 다시 걷지 않아도, 한 번 나란히 걸었던 시간은 삶의 어딘가에 조용히 놓인다.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충분히 풍성해진다.
곰과 늑대가 얼음 아래 잠든 물고기들을 마주하며 느꼈을 그 순수한 경이는, 누군가와 함께 바라볼 때 세계가 달라지는 순간의 감정이기도 하다. 얼마 전 미술 전시회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도서관에서 수업을 같이 듣던 회원님과 우연히 만나 전시장 안을 함께 둘러보았다. 회화와 설치미술을 살피며 각자의 눈에 들어온 지점을 가리켜 보였는데, 신기하게도 같은 작품 앞에 서 있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곳은 조금씩 달랐다. 그 차이를 발견하는 순간마다 작품은 매번 새롭게 열리는 기분이었다.
"여기 옛날 목욕탕을 배치했네요."
"아, 그러네요. 정말 옛날 추억이 돋아요."
한 설치미술 작품 앞에 멈춰 섰을 때였다. 혼자였다면 그저 독특한 구성이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지나쳤을 풍경이었다. 대화를 나누며 찬찬히 들여다보자, 그 속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역사의 어두운 장면이 상징적으로 담겨 있었다. 말 한마디가 더해지자, 흐릿했던 장면은 선명한 기억으로 마음속에 머물렀다.
다시 책 속, 곰과 늑대가 얼음 아래를 함께 내려다보던 장면을 떠올린다. 혼자였다면 그저 차가운 얼음판이었을 그곳은, 둘이 함께 멈춰 서서 바라보는 사이에 신비로운 세계가 된다. 산책이란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이동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잠시 공유하는 시간이다. 곰이 헤어지며 했던 말이 오래 남는다.
“함께 걸어서 정말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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