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품은 옷

by 책읽는아이린

『안나의 빨간 외투』

(해시엇 지퍼트 글, 아니타 로벨 그림 | 엄혜숙 옮김 | 비룡소, 2002)


요즘은 물건을 사는 일이 참 간편하다. 화면 위를 몇 번 클릭만 하면 물건이 집 앞으로 도착한다. 새벽 배송은 기다림마저 지워버린다. 이렇게 쉽게 손에 쥐게 되다 보니, 그 물건이 내 앞에 오기까지의 시간과 손길, 사람들의 얼굴은 생각하지 못한 채 지나치기 쉽다. 그런 나를 잠시 멈춰 세운 책이 《안나의 빨간 외투》였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의 어느 도시에 살았던 소녀 안나와 어머니 한나 슈라프트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전쟁이 남긴 것은 폐허와 결핍이었다. 돈은 없었지만, 엄마는 딸에게 따뜻한 외투를 입히고 싶었다. 한나는 안나의 손을 잡고 마을 사람들을 찾아간다. 양을 기르는 사람, 물레질하는 사람, 옷감을 짜는 사람, 재단사를 차례로 만나 “우리 안나에게 새 외투가 필요해요. 하지만 저에게는 돈이 없답니다”라고 말한다. 대신 그녀는 금 시계, 램프, 석류석 목걸이, 도자기 같은 소중한 물건들을 내놓는다. 외투 한 벌을 위해 자신의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건네는 모습에서, 물건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던 시대의 온기가 전해진다.


안나는 외투가 만들어지는 전 과정을 곁에서 지켜본다. 털이 실이 되고, 실이 천이 되고, 천이 옷이 되는 긴 시간을 눈과 몸으로 기억한다. 그 빨간 외투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관계와 기다림이 겹겹이 쌓인 결과물이다.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물건들 사이에서, 물건이 만들어지기까지 과정을 보며 우리는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


요즘은 옷 때문에 환경 문제가 심각하다. 너무 많은 옷이 생산되고, 팔리지 못한 채 버려진다. 그 옷들이 다다르는 곳은 결국 쓰레기 소각장이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지에서 생산된 옷들은 다시 돌아와 옷더미가 되어 산을 이루고, 일부는 바다로 흘러간다. 값싼 가격을 맞추기 위해 대부분 석유에서 추출한 화학 섬유로 만들어진 옷들은 사용하고 폐기하는 과정에서 미세 플라스틱을 내뿜는다. 바닷물에 녹아든 미세 플라스틱은 먹이사슬을 따라 결국 인간의 몸으로 되돌아온다. 우리가 가볍게 입고 버린 옷의 시간이, 이렇게 무겁게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창하지 않다. 옷을 사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는 일, 지금 가진 옷을 오래 입는 일, 중고 시장을 이용하는 일, 쉽게 사지 않고 쉽게 버리지 않는 일에서 시작된다. 누군가의 손과 시간이 들어간 옷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선택은 조금 달라질 수 있다. 한 벌의 옷이 만들어지기까지 걸린 시간을 생각하는 태도는 곧 자연을 대하는 태도이다. 이제 나는 옷을 고를 때, 그 옷이 얼마나 오래 함께할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해보려 한다. 시간을 품은 옷을 선택하는 일은, 결국 다음 세대가 살아갈 시간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한 벌의 옷에 깃든 시간을 존중하는 선택이, 우리의 삶과 자연을 조금 더 오래 지속하게 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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