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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난포 Jun 21. 2024

(어딘가에 있을) 다정한 의사를 찾아서

환자와 의사 그리고 이타적 반응 모델

이타주의는 사실 굉장히 거창한 말이다. 그래서 이타심, 이타적 사람이란 거리감이 느껴진다. 성인군자처럼 무한히 선량하거나, 목숨을 걸고 남에게 베푸는 영웅적 인간은 정말이지 가뭄에 콩 나듯 있다. 하지만 나는 심리학자 스테퍼니 프레스턴이 저서 《무엇이 우리를 다정하게 만드는가》를 통해 제시하는 '이타적 반응 모델(altruistic response model)'을 통해 이타성을 유연하게 해석해보려고 한다. 책의 본질적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을 돕게 되는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뇌과학적 기전은 무엇인가?


용어가 다소 낯설기는 해도, 책을 읽어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적일만 하다. 인간은 포유류이기에 어린 새끼를 돌보는 본능에서 파생한 신경생리적 반응이 있다. 따라서 특정 상황에서 새끼와 유사한 대상이 보내는 신호가 조력으로 연결된다. 이를 단순한 개체적 경향을 초월하는 공통적 생물 기작, 즉 이타적 반응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뇌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를 찾고 해석하고 반응하는 회로가 깔려있다. 그래서 이타적 반응이 촉발되기만 한다면, 남을 기꺼이 도울 수 있다. 내 새끼가 아닐 지라도.


이타적 반응의 구체적인 조건은 이런 식이다. 우리는 보통 어리고 미약한 개체를 선뜻 돕는다지금 당장 긴급한 도움이 필요해 보일 때에 이타적 반응이 일어나기 쉽다. 만약 대상자가 조력자와 관계가 밀접하다면 도움을 얻기 용이하다. 조력자에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판단력도 필요하다. 한편, 도움을 방해하는 특정 요소(조력자의 자신감 부족이나 조력을 저해하는 상황 등)이 있다면 도움 행동은 숨어버린다. 물론 유달리 착하고 남을 위하는 개개인의 성격 요소도 있을 덧이다. 어쨌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게다가 무력한 새끼를 공들여 오랫동안 키워야 한다. 도움을 끌어내는 공통적인 본능 신호(새끼다움)존재한다는 것이 논리적이다. 신호의 강도에 따라서 도움은 더 강력해지기도, 사그라들어버리기도 한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이타심은 조건과 맥락에 따라 변한다.


이타적 반응 모델은 인간의 모든 도덕심과 선량함, 모든 종류의 이타적 행동을 설명하려고 들지 않는다. 나도 그에 동의한다. 인간의 이타적 행동에는 더 많은 요인과 더 복잡한 기전이 자리할 것이다. 다만 나는 환자-의사 관계도 이타적 반응 모델이 작동하는 상황임이 분명하다고 믿는다. 조력을 요청하는 신호-조력자의 해석/반응이 나타나는 원리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의사가 각종 신호에 근거하여 반응을 보이는 방식은 이렇다. 위급한 환자, 중한 환자에게는 특별히 더 주의와 노력을 기울인다. 의료 시스템 안에서도 그들에게 우선순위가 있다. 유난히 취약하고 어린 대상에게는 본능적인 측은지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한 번 더 들여다보고, 한 번 더 고민하고, 거듭 설명하고 당부하는 것은 (교과서에 그렇게 씌여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니고) 마음이 쓰이기 때문이다. 능력을 벗어나거나, 돕는 것이 방해받는 상황에서는 의사도 주저한다. 포유류이고 인간이기에 당연한 일이다. 


내 의견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전형적인 이타적 행위란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영웅적인 활동이다. 반면 의사는 돈을 받는 직업에 불과하지 않는가? 게다가 환자로 병원에 가보면 의사는 고작 딸깍 마우스 몇 번 누르고 큰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타심과는 하나도 상관 없는 것 아닌가? 나는 나를 위해서 무려 이타심까지 발휘해주는 의사를 평생 한 번도 본 적이 없는걸- 당신이 이런 생각이 든다면... 축하할 일이다! 앞서 전제한 것처럼 이타적 반응은 긴급 상황, 중환자, 취약자에 집중된다. 의료에서도 그렇다. 청년과 중년층의 상당수는 치명적인 상태나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상황에 노출될 일 자체가 드물다. 대다수의 치료가 동네 의원의 평이한 진료로 마무리될 것이다. (내게도 일상적인 진료는 이타적 반응을 건드리는 일이 좀처럼 없다.) 하지만 생사가 오가는 직역에 가까울수록 의사는 매일같이 그런 환자를 만난다. 여기서 말하는 이타성, 이타심은 개개인의 선량함과는 다르다. 한 명의 인간이 다른 한 명의 약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을 만나는 순간, 좋든 싫든 어느 정도는 '이타적 반응'의 스위치가 켜진다.


물론 의사는 하나의 직업이다. 그것도 요즘 욕을 많이 먹는. 혹자는 의사에게 이타심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누구나 의사도 인간임을, 그래서 이타적 반응 모델에 부응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 이유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환자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이것이기 때문이다.

선생님 본인 일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선생님 가족이라면, 어떤 방법을 권할 거에요?

이런 질문은 사실 현대 의학에 썩 어울리지 않는다. 의사라고 해서 남들과 다른 특별한 치료를 할 수 있거나, 내 가족만을 위해 몰래 숨겨뒀던 비밀스러운 약을 먹이는 일은 없다. 의학은 어디까지나 인간에게 보편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함의는 다른 차원이다. 대상과 연대가 깊고 관계가 가까울수록 더 세심히 돌보고 더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를 당신의 가족이라고 생각해 주세요.'는 인간인 의사에게 가장 이타적인 반응을 기대하고 하는 말이다. 스위치로 켜고 끄는 전구 같은 존재에게는 이런 호소가 필요하지 않다.


의사의 모든 행동이 이타적 반응에만 기대지 않는다. 직업으로서 정해진 역할도 수행하고, 돈도 열심히 벌어야 하고, 사회적 체제에 부응도 해야 한다. 그래도 가장 취약한 환자에게는 본능에 근거한 이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는 중환자실의 환자에게, 촌각을 다투는 처치가 필요한 산모에게, 의식이 없는 채로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에게, 인큐베이터 속의 작고 연약한 미숙아에게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유무형의 헌신이 필요하다. 이타적 반응이 문제 없이 작동할 때 의사가 응급 환자에게 발 빠르게 뛰어가고, 퇴근 후에도 더 나은 치료를 고민하며 연구하고, 품을 아무리 많이 들여서라도 최선의 수술을 해낼 수 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이타성은 명령으로 강제하거나 수치로 계량할 수조차 없다. 


요즘엔 언론과 정부가 앞다퉈서 환자와 의사 간의 신뢰 관계를 훼손한다. 의료 소송을 부추겨 억지 갈등을 만들고, 때로는 어쩔 수 없는 결과마저 형사적 책임을 물린다. 이타적 반응의 조건으로 되돌아가보자. 피해자와 조력자 사이에 사회적 연대가 부서지면, 더 나아가 돕는 행위가 잠재적으로 자신을 해칠 수 있다면 이타적 반응은 사그라들어버린다. 의-정 갈등이 극한에 치달으면서 사회 곳곳에 불안과 불만이 치솟는다는 것은 진심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악의적으로 과장하고 매도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불의이다. 가장 고통받고, 가장 약한 자들에게 필요한 성실한 이타심을 사그라뜨리는 행위이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다정한 의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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