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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의 May 17. 2024

불효자 낳는 태몽을 꾸었습니다.

산부인과 의사가 생각하는 태몽의 의미

아기를 임신했을 때 신기한 꿈을 꾸었다. 태몽이나 태교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꿈 전개가 너무나도 '태몽'스러워서 주변인들이 아기 태몽을 물어보면 이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아마도 그때 그 꿈이, 태몽인가 보다 하고.


내용인즉슨 이렇다. 꿈속에서 나는 북유럽 어촌에 살고 있는 처녀(?)였다. 어째서인지 꿈속에 남편은 등장하지 않았다. 하루는 부둣가를 거닐고 있는데, 새하얀 아기 하프 물범이 내게로 통통 배를 튀기며 다가왔다. 너무 귀여운 모습에,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을 풀어서 물범을 안아주니 강아지라도 되는 양 품 안에 쏙 안겼다. 나는 엄청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얘 좀 봐! 너무 귀여워!! 누가 나 사진 좀 찍어줘." 바닷가에서 물범 줍줍을 할 때만 해도, 사진으로 기념해야 할 만한 일회성 사건으로 생각한 것이다.


들어는 보셨나, 하프물범 태몽?


그런데 이 물범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키우게 되었다. (엥?) 물범은 무럭무럭 쑥쑥 자랐다. 눈처럼 새하얗던 털이 얼룩덜룩 변하며 색이 어두워지고, 덩치도 엄청나게 커졌다. 문제는 행동도 갈수록 포악해졌다는 것이다. 이 마을의 이웃들은 다들 어업이 생계였는데, 이 물범 녀석이 동네 물고기를 죄다 뺏어먹고 주민들을 위협하는 바람에 항의와 눈초리를 어마어마하게 받았다. 덕분에 그 녀석과 매일같이 옥신각신 하게 되었다. 아, 참고로 이 애완 물범에게는 사람으로 형태를 변형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엥?x2) 내가 데려왔을 때만 해도 작은 천사가 따로 없었는데, 동네의 폭군으로 군림하게 된 시점에는 아래 사진의 느낌이었다. 나는 포악한 아저씨가 된 녀석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이 금쪽이를 두고 강형욱 사육사를 찾아가야 할지, 오은영 박사님을 찾아가야 할지...


나의 작고 귀여운 하프물범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사진은 영화 황해의 김윤석 배우


견디다 못한 나는 결국 물범에게 최후통첩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물고기를 뺏으면 더 이상 마을에서 살 수 없다. 이제 너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김윤석 물범은 분노하더니, 자기와 얌전히 헤어지려면 돈을 내놓으라고 나를 몰아세우며 거칠게 협박했다. 당시 이 녀석이 마을을 영영 떠나는 조건으로 나에게 요구한 거액이 무려... 백만 원(엥?x3)이었다. 나도 지지 않고 바락바락 응수했다. 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여태 키워주고 돌봐준 게 얼만데. 네놈이 나에게 돈을 내놔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내가 순순히 돈을 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녀석은 노선을 바꿨다. 자신이 사냥해서 물고기를 잡아올 것이니, 그 물고기 값만큼은 돈으로 쳐서 달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물범 모양으로 변해서 먼바다로 떠나버렸다. 그렇게 꿈이 끝났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하프물범은 실제로 어렸을 때 하얗고 뽀송하다가 성체가 되면 색이 어두워진다고 한다! 소오름!!!


자고로 태몽이란 임신 사실을 암시하거나, 아기의 성별이나 기질에 대해서 예견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 보통의 가벼운 믿음-혹은 미신-이다. 그래서 나의 길고 장황한 태몽(?) 스토리를 들려주면 사람들은 살짝 당황한다. 태몽 이야기를 나누며 '어머, 예쁜 아기가 나오려나 봐요! 과일은 딸 태몽이래요.' '세상에, 용이라니, 큰 인물이 되려나 봐요~' 정도로 꿈 내용에 장단을 맞춰 주는 것이 보통 아닌가? 한데 나의 태몽 속 하프물범은 누가 봐도 매운맛 불효자인지라 '부드러운 분홍 복숭아를 따는 꿈'이나 '여의주를 문 용이 승천하는 꿈'처럼 길조로 해석하기에는 무리다. 뭐, 어쨌든 신경 쓰지는 않는다. 꿈은 꿈일 뿐이다.


산부인과 진료에도 당연히 태몽에 대한 의학적 해석이 없다. 사람은 원래 꿈을 많이 꾼다. 그중에 몇 가지만 기억할 수 있고, 기억나는 꿈을 의미 있는 사건과 연결 짓는 경향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태몽에 대해서 의사로서 아무런 할 말이 없다. 태몽의 타당한 꿈풀이? 태몽의 과학적 의의? 그런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기를 낳고 보니, 오늘날 되새겨볼 만한 태몽의 진짜 의미는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천 년 전 여인이라고 가정해 보자. 임신인지, 아닌지 무슨 수로 알 수 있을까? 여러 날이 지나도 생리를 안 하고, 차차 배가 불러올 때까지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 미치게 궁금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삼신할머니에게 잘 점지해 주십사 열심히 빌어 보는 수밖에. 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주변의 온갖 미신적 증거들을 모아서 임신과 연관 짓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알쏭달쏭 투성이인 임신과 출산. 과거의 사람들이 이 거대한 무지 속에서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헤아려 보면 안쓰럽다. '태몽'은 전근대의 그러한 수많은 풍습 중 하나이다. 임신이라는 불확실성의 망망대해 속에서, 실낱같은 규칙을 찾으려는 발버둥.


사실 임신이 정확히 어떤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는 현대 의학에서도 대단히 까다로운 영역이기는 하다. 그래도 과거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지적 개척이 이루어졌다. 덕분에 우리는 아기를 점지해 주는 신비로운 꿈에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간단히 소변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임신 테스트도 있고, 피검사로 직접 호르몬 수치를 확인할 수도 있다. 아기의 상태와 성별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초음파 검사도 있다. 임신에 대한 마땅한 정보가 없어서, 꿈에서라도 의미를 캐내던 시절보다 얼마나 사정이 나아졌는가? 운 좋은 현대인들은 태몽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저 임신과 관련한 쏠쏠한 일화로 가볍게 받아들여도 충분하다.


물론 현대 의학이 만능은 아니다. '임신 여부 확인'에 대해서라면 태몽은 의학에 KO패를 당하겠지만, 태아의 기질과 장래를 점치는 방법에 대해서는 산부인과 의사도 여전히 모른다. 아기가 태몽 따라갈지 누가 알겠는가? 혹시라도 아들이 훗날 나에게 뺏어 달아나는 불효자로 자라나면, <태몽에 대한 증례 보고 1례>로 독자 분들께 꼭 다시 소식을 알려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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