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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나던피 Nov 07. 2023

있는 그대로, 날 것 그대로

어류든 육류든 단연코 회



“우리 진지하게 만나보자.

사귀자는 말 가볍게 하는 거 아니야.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               




첫 데이트 날, 남자친구의 입에서 나왔던 섣부르고 아찔했던 말입니다. 코로나 격리가 해제되자마자 잡힌 데이트에 제대로 설레볼 틈도 없이 받아버린 고백 공격. 정확히는 사귀자는 고백인 건지, 결혼하자는 프러포즈인 건지 그 성격을 알 수 없는 1타 2피 성 발언에 당혹스러웠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짝 오른 취기에 당혹감은 이내 기분 좋은 미소로 바뀌었지만요. 그때 우리 앞에 놓여있었던 육회 한 접시. 데이트 날 무얼 먹고 싶냐는 남자친구의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음식이었습니다. 파스타보다는 콩국수, 스테이크보다는 삼겹살, 와인보다는 소주. 소주 하면? 어류든 육류든 그중에서도 으뜸인 안주는 단연코 ‘회’였습니다.  



정확한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나이가 들면서 날 것의 매력에 폭 빠져버렸습니다. 이 맛을 모르던 어린 시절, 가족끼리 횟집이라도 가는 날이면 도대체 이 맹맹한 걸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의아함만 품은 채 회 한 점 집어 초장에 절이다시피 푸욱 찍어 먹곤 했었지요. 입 안에서 느껴지는 것이라곤 새콤달콤한 초장 맛에 오도독, 쫄깃한 식감뿐. 빨간 초장을 입에 묻히고 크으. 이 맛이지. 초장의 힘을 빌려 회를 즐기고 있노라면 맞은편 부모님의 세상에서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올곧게 쥔 젓가락 끝에 덜미를 잡혀 무력해 보이는 회를 간장에 가져다 톡. 하고 감질나게 찍어 곧바로 입으로 가져다가 오물오물 맛있게도 드시는 우리 부모님의 모습. 어린 내 눈에 비친 그 일련의 과정은 미지의 세계에 속하는 어른들의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나는 속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엄마와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세계에 합법적으로 발을 들이게 되며 많은 것이 변해갔습니다. 스무 살. 살갗에서 풍겨대는 쌉싸름한 풋내가 그리 진한지도 모른 채 금단의 열매를 탐하듯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소주의 쓰고 역한 맛이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 술을 마실 때마다 느낄 수 있던 ‘이전과는 다른’, ‘어른이 된’, ‘더 이상 보호받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그런 ‘나’에 한껏 취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알코올 풋내기답게 치기만 있을 뿐 ‘나와 술’ 우리 둘 관계에 대한 이해는 무에 가까웠으므로 어느 날, 어떤 사람들과, 어떤 술과 어떤 안주로, 또 얼마만큼의 술을 마셔야 하는지도 모르고 흑역사를 찍어냈던 기억에 입술이 바짝 말라오네요.      



이런 면에서 인간이 학습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점차 나와 술의 관계성을 찾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배부른 맥주보다는 좀 더 가벼운 소주가 취향에 맞았고, 소주를 찾아 마시다 보니 쓰고 독하게만 느껴지던 그 맛이 더러는 달게 느껴지는 날도 있더란 말이죠. 속내를 알 수 없는 초록병에서 쫄쫄쫄 흘러나오는 게 소주라는 사실은 변함없는데 기분이 좋을 때, 반대로 좋지 않을 때,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에 따라, 식당의 밀도와 소음의 정도, 분위기, 곁들이는 음식에 따라 그날그날 술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경험은 제게 진정한 술맛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알싸한 단맛과 함께 태연히 올라오는 알딸한 취기의 묘미를 알게 되면서 안주에 대한 선호도 잇따라 명확해져 갔습니다. 기름지고 무거운 음식보다는 가벼운 음식을, 여러 가지 맛이 첨가된 음식보다는 좀 더 단순한 맛을, 소주를 한 입 털어 넣었을 때 입 안에 머무는 달짝 씁쓰름함을 적당히 타협해 지워줄 수 있는 그런 깔끔한 맛.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순간 취향이 완성되어 갔습니다. 여기에 딱 맞는 음식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그것. 날 것의 ‘회’였습니다. 내 인생에 술이 끼어들면서 삼삼한 맛의 회를 즐기던 부모님의 취향도 그제야 이해가 되더군요(아이러니하지만 부모님은 술을 즐기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초장맛으로만 먹던 회를 이제는 생와사비 그득 푼 간장에 아주 살짝만 찍어 먹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소주와 곁들이는 회. 정확히는 ‘날 것’의 매력을 알게 된 후로 이 영역을 점점 확장시켜 갔습니다. 깔끔하고 식감이 살아있는 생선회에서 바다내음이 물씬 풍겨 그 향으로 존재감을 마구 뽐내는 해산물들까지 말이에요. 생긴 건 거시기하지만 씹을수록 단맛을 내는 개불, 오독오독 씹는 재미가 있는 해삼, 시원한 감칠맛을 내는 멍게, 미끄덩하니 입안을 부드럽게 감도는 굴. 어릴 때는 비리고 역해 근처에도 가기 싫었던 해산물의 맛이 이다지도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니. 못 먹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 이전과는 또 달라진 나를 발견한 순간. 재밌게도 나는 좀 더 강해졌다 생각하며 뿌듯했던 같습니다.      



그렇게 육지의 날 것에도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사실 육회의 존재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편견 덩어리였던 과거의 저는 육회라는 음식을 인생의 거친 맛을 아는 걸걸한 상남자들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때는 소를 회처럼 먹는다는 사실이 어딘지 불편하고 조금은 잔혹한 일처럼 느껴져서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생고기, 육회를 없어서 못 먹는다는 게 또 웃기지만. 생선회와는 달리 더 찰기 있고 쫀쫀한 식감이 살아 있는 생고기는 경상도식 다진 양념과 참기름, 다진 마늘이 섞인 장을 휘휘 섞어 한 점 콕 찍어 먹으면 술이 술을 부르는 안주가 되고, 생고기를 얇게 썰어 달큼한 양념에 저며 예쁜 노른자를 올려 먹는 육회는 달콤하고 고소함이 주는 맛이 아주 일품입니다. 친구와 처음 육회를 먹으러 갔던 날, 기대한 것보다 몇 곱절은 더 맛있는 육회의 맛에 반해 한 동안은 육회만 먹으러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일까요. 남자친구가 첫 데이트 때 먹고 싶은 음식을 물었을 때 육회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 육회에 소주 한 잔이 아닌 다른 음식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해 봅니다. 가장 좋아하는 안주를 먹으며 기분이 좋아지고, 술 한 잔 하며 긴장이 풀리고, 서로에 대해 묻고 대답하고, 그러다 조금은 성급한 고백과 프러포즈까지 받아 버렸지만, 그럼에도 그의 행동을 귀엽게 바라볼 수 있었던 건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소주와 육회, 그리고 취기가 주는 붕붕 한 기분과 내 앞에 좋아하는 남자까지. 좋아하는 것들 투성이었던 날 그날 맺어진 인연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 부부로 지내고 있습니다. 지나친 음주는 해롭지만 좋은 사람들, 좋은 음식, 좋은 분위기에서 마시는 술은 제 인생에 윤활제 역할을 해주는 듯합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안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 나와 함께 소주 한잔에 날 음식을 곁들일 사람은 누구일지, 또 어떤 인연을 맺을지 여전히 설레고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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