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짝 친구를 소개합니다.
나는 스스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다. 이 당돌한 생각을 가능케 하는 건 내 친구 숭이 덕이다. 그녀와 나는 성장기에 누구나 한 번쯤은 앓는다는 병. 중2병이 도지기 시작하는 15살에 만나 친해지게 되었다. 자아도취에 빠져 마음속에 미쳐 날뛰는 흑염룡을 품고 있던 시기였던지라 잊고 싶은 서로의 흑역사에 대해 낱낱이 알고 있는 우리. 19년 지기인 숭이와의 우정을 회고하는 일이 어쩐지 찜찌부리하면서도 유쾌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내 인생의 삼분의 이라는 시간을 차지하는 그녀. 숭이. 가랑비에 옷 젖듯 내 삶에 젖어든 숭이. 나는 그녀와 함께 자랐다. 그녀와 함께 어른이 되었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건 초등학교 4학년 같은 반이 되었을 때다. 당시 숭이와 나는 같은 학급 구성원으로 일면식만 있을 뿐 서로 말도 몇 마디 나누지 않는 사이였다.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 숭이의 존재감이 비교적 분명 해지는 사건이 있었다. 막 중학생이 되어 아직은 어색한 교복을 입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맞은편에서 자전거를 끌며 내 쪽으로 다가오던 아저씨가 나를 유심히 보더니 갑자기 말을 붙이는 게 아닌가.
“야야, 니 **여중 다니나?”
“네?... 맞는데요..”
“그카면 니 **라고 아나?”
“네. 알긴 알아요.”
“아이고.... 니 내일 학교 가면 **한 테 만화책 좀 반납하라고 캐주라.”
“네...??”
“반납을 왜 이렇게 안 하는 건지~~!! 연체 오래됐으니 얼른 책 반납하라고 꼭 전해주라!!”
“엇어..... 넵....”
어리숙하게 대답을 하고는 난처한 부탁을 받아 피곤해져버렸네 싶었다. 그나저나 숭이는 왜 그토록 오래 책을 반납하지 않은 걸까 하는 궁금증과 동시에 화를 낼 법도 한데 그 자리에 존재하지도 않는 숭이를 달래 듯 책 반납을 부탁하는 아저씨의 말투가 제법 따뜻하게 느껴졌다. 내 14년 인생 처음 받아보는 형태의 숙제였다. 숭이에게 말을 전하지 않으면 아저씨께서 책이 연체되는 일에 대한 책임을 내게도 물으실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나쁜 숭이.
다음날, 어떻게 말을 전할까 여러 시나리오를 짜보며 숭이네 반으로 향하던 복도 위에서 그녀를 마주하게 되었다. 여태껏 마주치면 대면대면 봤던 그녀의 얼굴이 그날따라 어찌나 선명하게 보이던지! 친한 친구를 마주한 것 마냥 얼마나 반가웠던가! 숭이를 불러 어제 있었던 일을 설명하니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어. 그래.”라고 대답하고는 홀연히 가던 길을 가버렸다. 마치 NPC에게 퀘스트를 받고는 이제 더 볼일 없다는 듯이. 숭이의 냉랭함에 꽤나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저 아저씨의 말을 전달했을 뿐인데 내가 뭔가 실수한 듯한 느낌이 들면서 조금 억울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딘지 모르게 딱딱하고 까칠해 보였던 숭이. 그렇게 숭이에 대한 인상이 형성되었다.
작고 아담한 체형, 지을 수 있는 표정 값이 무표정 하나인 사람처럼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던 아이. 그래서 앙 다문 입이 더 도드라져 보였던 아이.
그녀와 본격적으로 친해지게 된 건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였다. 공교롭게도 그녀와 같은 반이 되었고 이번에는 서로의 앞 뒤 자리에 앉게 되었다. 숭이가 앞, 내가 뒷자리. 그 시기에 자리배치는 친구 관계를 암묵적으로 지정해주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울려 놀게 되었다. 종이 땡치고 쉬는 시간이 되어 같은 자리 친구들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웃고 떠들다 보면 쉬는 시간 10분이 금세 지나가기 일쑤였다. 하교 후, 숭이와 오락실 노래방에서 동전 몇 개로 가수 뺨치는 실력을 가진 것 마냥 노래를 부르다 집에 가거나 만화책방에 들러 어떤 책을 빌릴지 심도 있게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숭이네 집. 또 어떤 날은 우리 집에 와서 노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막상 친해져 보니 숭이는 굉장히 장난기 많은 아이였다. 그것도 아주 짓궂은 스타일로. 날씨가 제법 선선해지며 여름 하복 대신 춘추복을 꺼내 입을 즈음이었다. 숭이와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함께 하교를 하고 있었고 늘 지나치는 공원 네거리에 멀뚱히 서서 초록색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심심했던 건지 숭이는 우끼끼 거리는 원숭이처럼 펄쩍 거리며 내 옷을 부여잡더니 이리저리 밀고 당기기 시작했다. 부왁-! 이게 무슨 소리인가 상황 파악이 채 되기도 전에 놀라 동그래진 눈에 웃음을 참느라 벌게진 숭이의 얼굴이 보였다. “니나야... 미안...”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리니 춘추복 조끼의 허리 쪽이 시원하게 찢어져 있었다. 그날은 숭이가 무안할 정도로 있는 힘껏 그녀에게 화를 냈던 것 같다. 그렇게 이 날의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숭이가 되었다. 원숭이의 숭이. 어떨 때는 원숭이보다 더한 숭이.
가끔 도가 넘치는 장난으로 나를 난감하게 만들긴 했지만 그래도 친구는 친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숭이가 좋았다. 숭이는 굉장히 재주가 많았는데 특히 예체능 쪽 재능이 남달랐다. 대화를 나눌 때는 알아채지 못했으나 그녀가 노래를 부를 때 내는 목소리는 맑고 청아하기 그지없었다. 15살 인생, TV에 나오는 가수들만 노래를 잘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곁의 누군가 그것도 나와 친한 친구의 재능을 목격하는 일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와 관련해 기억력이 좋지 못한 내게도 선명히 기억나는 일화가 있는데 바로 숭이가 교내에서 열리는 노래 경연대회에 참가했던 일이다.
숭이는 대회에 나갈지 말지 굉장히 망설였는데 나는 분명 그녀의 순진함을 머금은 맑은 목소리와 시원하게 고음을 내지르는 실력이라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라 확신했었다. 별관에 위치한 작은 음악실에서 열리는 대회였던지라 대회에 나가는 참가자와 그들을 응원하기 위한 학생들이 모여드니 그 작은 공간이 금세 복작복작 북새통을 이루었다. 나 역시 떨리는 마음으로 숭이를 응원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그녀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회 진행을 맡은 음악 선생님이 다음 순서를 호명했다. “다음 ◇학년 □반 강ㅇㅇ.” 숭이가 노래를 부르기 위해 학생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숭이가 선택한 곡은 그 시절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던 백설 광고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이었다. Fujita Emi의 Wishes. “I looked in the sky and there I saw a star~" 언제나처럼 앙 다물려 있던 입이 뻐끔하고 열리더니 나만 알고 있던 숭이의 고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웅성웅성거리던 소음이 내려앉았고 대신 아름다운 음색이 그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면 숭이가 웃을 텐데 그때만큼은 그녀가 천사처럼 보였다. 영어에 약했던 숭이는 가보지도 못한 낯선 나라의 언어를 외우기 위해 가사가 쓰인 종이가 찢길 정도로 그것을 들고 다니며 주야장천 노래를 불러댔다. 항상 붙어있던 나조차 얼떨결에 노래 가사를 외우게 될 정도였으니 정말 열심히였다. 하지만 너무 긴장했던 탓이었을까. 이내 숭이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하더니 노랫소리가 멈추었다. 가사를 까먹고 만 것이다. 덩달아 놀라버린 내가 자리에 앉아 다음 가사를 외쳤으나 그대로 얼어버린 숭이에게 내 목소리가 미쳐 전해지지 못했던 것 같다. 숭이가 그때 노래를 완창 했다면 우승은 분명 그녀의 것이었으리라.
숭이는 글도 잘 쓰는 아이였다. 그때 나는 글쓰기에 관심이 없어 그녀의 글이 선생님들께 칭찬을 받고 복도 한편 액자에 걸리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숭이는 관찰력도 좋고 다른 친구들에 비해 감수성도 풍부했으며, 그것을 종이 위에 소복이 구현해 내는 감각 좋은 아이였던 것이다. 지금의 숭이는 자신의 재능을 과소평가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자신만의 글을 쓸 줄 안다. 그녀가 예전에 써왔던 글들, 그녀와 주고받는 편지에 녹아 있는 그녀의 글은 딱딱하고 차가 워보이는 그녀의 겉가죽과는 너무나 달라 볼 때마다 흥미롭다. 그래서 숭이가 다시 자신만의 글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내게 그녀의 글을 보여주었으면.
감수성이 풍부했던 탓에 라디오를 즐겨 들은 건지, 라디오를 듣다 감수성이 풍부해진 건지. 인과관계의 방향성을 따질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녀가 TV보다 라디오를 즐겨 듣는 감성 소녀였다는 것이다. TV만 틀면 재밌는 것들이 맛있게 차려진 밥상처럼 대령되는데 화면을 보지 않고 소리로만 콘텐츠를 즐긴다는 게 그때의 내게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내 생일 선물이라며 견출지 위에 [니나의 생일 축하]라 적힌 알록달록 꾸며진 카세트테이프를 건네는 것이었다(정확히 몇 살 때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중학생이었던 것 같다). 집에 돌아가 카세트테이프를 재생시키자 익숙한 목소리의 라디오 DJ가 “니나야~!! 생일 축하해~~~!!”라며 큰 소리로 외쳤고, 그 후로 숭이가 녹음해 놓은 노래들이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무질서하게 흘러나왔다. 놀라고 들뜬 마음에 당장 숭이네 집으로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다. 라디오를 듣던 중 누군가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낸 사연을 듣다가 그 사연 속 주인공의 이름이 니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바로 카세트테이프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고. 숭이가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직접 녹음한 테이프.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녹음과 정지 버튼을 수십 번 눌러가며 무작위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편집했을 숭이. 그 덕에 나는 다시없을 선물을 받아본 운 좋은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중학생이었던 시절은 인터넷이 막 발달하던 시기였기에 요즘의 10대들과는 노는 방식이 판이하게 달랐다. 학교를 마치고 서로의 집에 가면 우리는 낙서를 하거나 각을 잡고 그림을 그리곤 했다. 지금의 내 글씨체와 그림 실력은 당시 숭이의 그것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뭔가를 그릴 때 고민하며 선뜻 종이 위에 펜을 놀리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막힘 없이 의미 있는 형태를 창조해냈다. 그녀에게 그런 일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어렵지 않다는 듯 무심하고 자유롭게 몇 번의 터치면 툭-하고 완성되었다. 장난꾸러기였던 숭이는 뭔가를 그리다 할게 없어지면 내 얼굴을 그리곤 했는데 문제는 너무 극사실주의로 그려놓은 탓에 그림 속 내 모습이 괴랄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이다. 더 약 오르는 건 현실의 나와 닮아 있어 어처구니없는 웃음만 나온다는 점이었다. 숭이는 나를 놀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걸까? 숭이는 어른이 된 지금도 나를 제일 잘 그린다고 말한다. 그녀는 눈 감고도 나를 그려낸다. 이건 사실이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면서 우리는 더 이상 같은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다. 공부에 딱히 욕심이 없고 실용적인 것을 좋아했던 숭이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공부를 해야 좋은 삶을 사는 줄 착각했던 나는 인문계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의존적이고 소심했던 나는 숭이를 비롯해 친했던 중학교 친구들과 멀어지는 일이 두렵고 싫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처음 보는 아이들과 친해지고 적응해 낼 자신이 없었다. 이런 불안함을 숭이에게 털어놓으니 그녀는 언제나처럼 특유의 무심함으로 나를 위로하였다. “잘 지내면 되지!” 예의 그렇듯 툭 내던지는 적당한 온도의 말은 어딘지 나를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내 걱정과는 달리 우리는 각자의 생활에 잘 적응하며 지냈고, 또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다. 학교와 어울리는 친구만 달라졌을 뿐 중학생 때와 비슷한 일상을 서로에게 공유했다. 싸이월드로 서로의 일상을 옅보면서 낄낄거리며 댓글을 달고 시간이 맞는 주말에는 만나서 놀기도 하는 평범한 날들을 보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다 어느 날 숭이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게 되었다. 내게도 갑작스러웠던 일이었는데 당시 숭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연락을 받고 장례식 장에 가기 위해 부랴부랴 검은색 계열의 옷을 찾기 시작했다. 맙소사. 예의를 갖출만한 검은색 옷이 도무지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겨우 하나 찾은 것이라고는 당시 유행하던 검은색 노스페이스 티셔츠뿐이었다. 고민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옷이 없는데 이런 걸 입고 가도 괜찮을지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조용히 고민하고 있는 엄마의 침묵이 기계음과 섞여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일단 장례식 장에 가야 하니 그 옷을 입고 바지도 어두운 계열로 입고 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긴가민가 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얼른 장례식장으로 가야만 했다. 숭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은 채로.
장례식 장에 가기 전 친구들과 모여 절은 어떻게 하니, 장례식장 예절은 어떻니, 어떤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 숭이를 어떻게 위로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17살이었던 우리에게 죽음은 무척이나 생경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긴장된 마음으로 장례식장에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숭이를 찾았다. 내 예상과 달리 숭이는 울고 있지 않았다. 우리를 발견했을 때 숭이는 늘 봐왔던 그녀의 모습대로 행동했다. 반갑게 인사하기. 그러고는 우리는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손님상으로 바로 안내해주었다. 우물쭈물 어떤 말을 건넬지 몰랐던 나는 괜찮냐고 물을 뿐이었다. 숭이는 괜찮다고 대답한 뒤, 평소처럼 우리와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숭이도 아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몰랐던 게 아닐까. 그래서 장례식장에 와준 친구들에게 평소처럼 대하는 게 최선일 거라 판단했던 것 아닐까.
아버지의 죽음 때문일까. 원인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어른이 된 숭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증을 앓고 있다. 그녀의 공포증을 의식하게 된 건 20대 중후반부터였던 것 같다. 존재했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죽어 사라지는 게 무섭다는 그녀. 숭이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털어놓을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들어주는 것뿐이다. 숭이의 공포감을 헤아리려 해 보았지만 그녀가 아닌 이상 공포심으로 가득 찬 심연의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가만히 죽음을 생각하면 존재 자체가 아득해지고 두려움에 심장이 뛰면서 앞이 깜깜하고 마음이 먹먹해져 눈물이 나온다는 숭이. 요즘은 어떠니 숭아. 이런 너에게 마흔 살이 되면 죽고 싶다며 농담처럼 던진 나의 말이 얼마나 무겁게 다가갔을까. 나의 철없는 넋두리에 두려움이 앞섰을 너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너를 배려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이제와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만났기 때문에 숭이와 나는 친해질 수 있었지 않나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둘의 성향은 너무나 달랐다. 야무지고 똑 부러졌던 숭이와 유하고 낭창했던 나.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성격 특성은 달랐지만 서로의 상처와 어두운 면을 공유하며 타인을 이해하는 일을 함께 배워나갔던 것 같다. 그 덕분인지 내적으로 소심하고 잔뜩 움츠러들어있었던 나는 숭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숭이는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야 비로소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가 될 수 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
20대가 되면서 숭이와 나는 점점 더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좀 더 본인다워졌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다. 대학에 가면서 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10대에는 해보지 못했던 일을 경험하면서 각자의 취향을 완성시켜 나갔다. 하지만 심각한 자기혐오로 대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불편했던 나는 외로움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숭이가 다니던 대학에 자주 들락거렸다. 숭이 곁에서의 나는 행동이 자연스럽고 편안했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과 곧잘 어울릴 수 있었다. 숭이의 선후배는 나의 선후배가 되었고, 숭이의 친구는 곧 나의 친구가 되었다. 숭이의 대학교 사람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해피바이러스였을 정도로 그곳에서의 나는 쾌활하고 밝은 사람으로 비쳤다. 숭이가 없었다면 그 시절의 나는 어땠을까. 숭이는 그런 친구였다. 나를 그럴싸한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친구.
전문대를 다녔던 숭이는 일찍 졸업을 하고 취업을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그녀가 없는 대구라니 홀로 남겨진 기분에 울적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숭이는 몰랐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의지를 많이 하고 있었다. 과연 나는 숭이에게 의지가 되는 존재였는지 모르겠다. 숭이가 서울에 상경했을 때의 나이는 23살이었다. 아무리 성인이라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불안전하고 미완성된 어린 나이가 아닌가. 서울에서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어려움과 고난을 겪었다. 숭이와 2시간 3시간이고 통화를 하던 그 시절 그녀는 누구보다 외롭고 우울한 상태였다. 그런 숭이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을 때, 오랜만에 본 그녀는 살이 많이 쪄있었다. 그때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숭이의 고달픈 마음 상태를 몸이 대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두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었던 비좁은 고시원 방에 살았던 숭이. 책상 위에는 씻지 않은 접시들이 수북이 쌓여있었고 옷가지들은 어질러져 있었다. 정리정돈을 잘하고 자신의 공간을 센스 있게 꾸밀 줄 알았던 숭이는 어디로 가고 없었다.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숭이에게 다른 말을 꺼내야만 했다.
직장인이었던 숭이는 멀리서 온 친구가 반갑다며 내게 무언가를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식당에 가서도 굳이 더 시키지 않아도 되는 메뉴를 추가로 주문했고, 자고 일어나자마자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켜 나를 먹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숭이와 웃으며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서울에서 그녀에게 사육을 당한 것과 다름없다. 3 킬로그램이 쪄서 기름진 얼굴로 대구에 돌아왔으니 할 말은 다 한 듯하다. 자신을 돌볼 여력도 없었던 숭이는 그렇게 나를 챙겨주었다. 내게 숭이는 늘 듬직한 언니 같은 친구,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멋진 친구였지만 그 시기만큼은 내가 보듬어주어야 할 동생 같았다. 숭이에게 받은 만큼 그녀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노력은 했지만 그녀만큼 잘해주었을 거라 말할 자신이 없다. 너는 내게 항상 그렇게나 큰 존재였다.
힘에 부쳐 지친 숭이는 3년이 넘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대구로 내려오게 되었다. 숭이는 차근차근 자신의 자리를 되찾아갔다. 가족들과 지내며 안정감을 느끼고, 다시 친구들을 만나 웃고 떠들고, 직장 생활을 하며 자신을 돌보는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숭이는 언제든 자신을 지킬 준비가 되어있던 사람이었다. 때가 되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그런 인생의 해프닝을 겪었을 뿐이다. 그 어두웠던 시기의 기억은 지금의 숭이를 더욱 빛나고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도구가 되었을 것이다.
숭이가 대구로 돌아온 그즈음. 20대 후반이었던 우리는 이미 어른이 되었기에 살아가는 환경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나는 논문을 준비하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숭이는 한 남자를 만나 오랜 연애를 하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매일 시답지 않은 카톡을 주고받고 볼 수 있는 날은 시간을 맞춰보면서 어떨 때는 함께 여행도 다녔다. 어린 날의 우리가 그랬듯이 유치하지만 어른의 행색을 갖춘 채로 우정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숭이는 그녀답게 조용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란스럽지 않게 사랑을 하다 그와 결혼해 자신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누군가의 아내라는 직함을 하나 더 얻은 숭이는 그 나름대로 멋지고 근사해 보였다. 이제는 그와 자신을 쏙 빼닮은 아들까지 낳아 육아전쟁을 치르며 살아가고 있다. 아이가 자란 지 1년이 넘자 그녀는 바로 일을 구해 집안 살림에 보템이 되는 야물딱진 생활을 해내고 있다. 숭이답게. 묵묵하고 단단하게. 나는 이런 그녀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는 어려운 일을 늘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해낸다. 숭이 너는 그런 너의 대단한 모습을 알까?
숭이. 너는 내 인생의 자랑이다. 내 삶의 자산이다. 누군가에게 너를 소개할 때마다 붙는 ‘내 가장 친한 친구’라는 수식어를 소리 내어 말할 때 나는 심장이 은근하게 데워지는 기분을 느낀다. 나와 함께 서로 친구가 되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분투해줘서 고맙다. 너는 늘 내게 멋지고 자랑스러운 친구였다. 너와 함께 어른이 되는 길을 걸을 수 있어 영광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어. 누구보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 애써줘서 고맙다. 나를 존중해줌에 항상 감사함을 느낀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내 친구 숭아. 곧 다가오는 너의 34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이 글을 너에게 바친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카세트테이프처럼 이 글이 너에게도 그런 선물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 늘 고맙고 사랑한다. 진심으로 너의 인생을 응원한다. 내 친구 숭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