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통해 목격하는 노년의 생
출근을 하면 컴퓨터를 켜고 업무를 위한 프로그램에 로그인 한 다음 흰 가운을 입고 잘 정돈된 사무실에 앉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입 마시며 시작하는 아침은 여유롭고 고상해 보일 수 있으나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되면 예능 프로그램 속 단골 게임 '고요 속의 외침’과 다름없는 장면이 연출된다. 어르신들을 모셔다 놓고 발 끝에서부터 최대한 에너지를 끌어 모은 후, 사자후를 날리듯 우렁찬 목소리가 성대를 거쳐 입 밖으로 퍼져 나오는 순간 나의 진정한 업무가 시작되는 것이다. 신경과 임상심리사로 일한 지 어느덧 5년 차. 5년 전만 해도 임상심리사가 되어있을 줄은 몰랐으나 정신 차려보니 1인분 몫의 유료 호흡을 책임지고 있는 생명유지장치가 되어 있었다.
내가 일하는 신경과 병원은 인지능력검사에 대한 수요가 높다. 다시 말하면, 어르신들을 모시고 마주 앉아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진행되는 치매검사가 업무의 주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또 다른 의미로, 검사실에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학생, 나는 선생님의 역할을 맡게 된다. 어르신들의 입장에서는 자식의 손에 이끌려 단순히 뇌 사진이나 찍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병원에 왔다가 느닷없이 시험을 쳐야 하는 듯한 상황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싶을 것이다. 물론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고 자꾸 깜빡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걱정되어 본인 스스로 병원을 찾으시는 분들도 있다. 이런 차이 때문인지 검사실 안에서 어르신들의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검사를 거부하고 비협조적으로 행동하거나 둘째, 검사에 능동적이고 협조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첫 번째 유형의 어르신들은 검사실에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얼굴에 불만과 짜증이 섞여있다. 잔뜩 성이나 앵그리 버드 같이 솟아 있는 눈썹에 입이 삐죽 튀어나와있고 나와 마주 보기를 거부라도 하듯이 의자에 삐뚜룸하게 앉아 시선을 피한다. 검사를 진행하기 위해 간단한 인적사항을 묻기 시작할 때 터져 나오는 이들의 볼멘소리가 앞으로의 검사가 어떻게 진행될지를 가늠하게 해 준다.
“어르신,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런 걸 와묻노!”
“어르신,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그런 거 알아서 뭐하게!!”
자신은 그저 아들, 며느리, 딸내미가 데리고 와서 앉아있는 것뿐인데 이런 걸 왜 묻냐는 것이다. 잔뜩 약이 올라 씩씩 거리는 어르신들의 반응은 흰쌀밥에 김치가 빼놓을 수 없는 짝꿍인 것처럼, 1 더하기 1의 답은 2인 것과 같이 뻔히 예상되는 행동인 것이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직업적 소명의식을 앞세워 그들을 어르고 달래기 바빴다. 하지만 5년이라는 시간은 현장에서 나를 지키면서도 효율적으로 일 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 맞닥뜨릴 때, 앞으로의 검사가 힘들 것이라 예상될 때, 나는 어르신들에게 ‘고 혹은 스톱’ 할지에 대한 패를 쥐어 준다. 앞으로 힘든 검사가 진행될 텐데 계속하실 수 있으시겠냐고, 나는 억지로 검사를 시키는 사람이 아닌 병원에 온 어르신을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본인이 선택을 하셔야 한다고, 계속 이 검사를 진행할 것인지 아니면 여기서 그만둘 것인지. 신기하게도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그들에게 선택권을 줄 때, 그들은 꼬리를 내리며 ‘고’가 쓰인 카드를 내 앞에 내민다. 이럴 때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인생의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60대부터 80대까지. 더 많게는 90대까지 연세가 지긋하신 어른들에게 이 검사는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지금이야 교육을 받는 것이 국민의 의무일만큼 교육이 당연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더 시급하고 중했던 그 시절에는 교육을 받는 게 호사스러운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검사실을 찾는 어르신들의 학력이 낮은 경우가 허다할 수밖에 없다. 자신들은 못 배웠기 때문에 이런 걸 물어봤자 모른다는 생각이 당연한 듯 심겨 있는 동시에 그것에 대한 수치심과 부끄러움, 원망과 서러움이 한데 섞여 그들 앞에 선생님처럼 행동하고 있는 내게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고 마는 것이다.
그나마 자신의 증상에 관심을 가지고 내원하시는 두 번째 유형의 어르신들은 협조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 검사를 진행하기가 훨씬 더 수월하다. 하지만 특별히 마음이 끌리는 마지막 유형이 있는데 바로 첫 번째 두 번째 유형이 섞인. 즉 보호자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병원에 왔음에도 검사에 협조적으로 임해 주시는 분들이다. 검사의 시작은 똑같다. 기본 인적 사항을 묻고 앞으로 진행될 검사가 시간이 오래 걸리고 꽤나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을 고지해준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편하게 말하시되 아는 것이나 할 수 있는 과제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주셔야 함을 덧붙인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식으로 머리를 써야 하는 이 검사가 힘들어 불평을 하면서도 억지로 끌려와서 억울하고 짜증이 나는 와중에도, 이 유형의 어르신들은 검사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자신들이 검사를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납득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고 나서 그들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과제를 이해하기 위해 골몰하며 머뭇머뭇 천천히 그것들을 하나씩 수행해나간다. 검사가 진행될수록 힘들고 머리 아파하는 기색이 역력함에도 묵묵히 검사를 이어나간다. 이런 모습을 마주 앉아 지켜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편에 일종의 경외심 같은 것이 일어 오른다. 이 작고 좁은 검사실 안에서 삶에 놓인 시련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나로 하여금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점점 감퇴되는 기억력, 노화되어 약해진 몸, 느려지는 말과 행동,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몸 안에 갇힌 그들은 삶이 놓아둔 달갑지 않은 고난과 역경에 각자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노화. 나이가 들어가는 자연이치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모두에게 공평하다. 화내거나 짜증을 내며 이를 거부하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 혹은 결국에 일어나고야 말 일이라면,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 낫다. 세 번째 유형의 어르신들은 그런 부류이다. 실낱같은 희망,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결국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용기를 내는 사람. 젖 먹던 힘까지 그러모아 지금 서있는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어르신을 상대하며 피부로 와닿는 진리가 있다면 단연코 인간 존재의 유한함에 관한 것이다. 기계 부품처럼 기능이 떨어져 그 쓸모가 다해버린 기관을 새것으로 교체할 수 있다면 삶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터인데 야속하게도 인간의 신체기관은 소모품이다. 살아온 세월만큼의 중력의 영향을 받아 힘을 잃고 쳐진 피부와 쪼그라든 입술, 빠지거나 약해져 단단한 음식을 씹을 수 없는 치아, 듬성듬성 숱이 없고 윤기를 잃은 머리카락, 성격을 가늠하게 해주는 주름의 방향들, 멀어지는 시력, 떨어지는 청력, 지방과 근육이 빠져 앙상해져 가는 몸, 무릎 관절이 닳아 느리고 어색해진 걸음걸이. 내부 장기기관도 사정은 마찬가지. 우리를 그럴듯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뇌가 나이 드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검사실에 앉아 검사를 받고 있는 어르신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들의 젊은 시절의 모습은 어땠을지 상상해보곤 한다. 상상 속 포토샵 프로그램을 켠 후, 그들의 얼굴에서 주름과 잡티를 지우고 쳐진 눈꼬리를 탱글 하게 올려본다. 눈동자와 머리칼에 생기를 더하고 피부톤을 한 톤 더 업그레이드시켜본다. 거기에 신체적 제약 없이 자유롭게 이리저리 걷고 뛰는 모션을 추가해본다. 어르신들이 한숨을 내쉬며 “내가 와이래 돼뿟노...” 라며 설움이 가득 찬 말을 내뱉을 때, 그들에게도 아무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던 젊음이 있었음을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려 한다. 점점 색이 바래져 갈 나의 젊음 역시도 당연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려 한다.
아주 어린 시절,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가득하던 그때는 서른 살이 되면 멋진 커리어우먼이 될 거라 생각했다. 뾰족구두를 신고, 선글라스를 끼고 몸에 딱 달라붙는 오피스룩을 입은 화려하고 멋진 어른이 되어 내 생활을 즐기고 있을 거라고. 드라마나 영화 속에 나오는 그녀들처럼 그런 ‘젊은 어른’이 되는 일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재밌는 건, 그때는 거기서 더 나이 든 모습. ‘완연한 늙음’에 대해 무심했던 탓에 노인이 된 내 모습이 어떨지 상상해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시절의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나이 듦의 범위는 30대까지였나 보다. 친척집에 가면 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길거리에 보이는 노인들이 날 때부터 마치 그 모습이었던냥 나는 늙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무의식 중에 그들과 나를 가르는 벽을 두고 있었다. 단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세워뒀던 벽은 이제 어디로 가고 없다. 내 나이 33살. 노화의 과정을 직접 체험하기에 충분한 나이이지 않은가. 동시에 내 일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에서 나이 듦에 대해 관찰하고 있다. 얄궂은 노화라는 녀석이 어떻게 우리를 시련에 빠트리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그래서 이 어중간한 나이 듦의 경계 위에서 내 앞에 놓인 질문지를 펼쳐들 수밖에 없다.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시간의 바람이 불어와 순간을 흩날려 보내면, 시간의 파도가 이 순간을 씻겨보내고 나면 실체는 사라지고 과거만이 남는다. 그리고 기억의 형태로 우리에게 기록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에서, 그게 무엇이든 좋은 것들을 기억에 담을 수 있는 선택을 하자 다짐한다.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하자고 다짐한다. 그 덕에 다시 오지 않을 나의 가장 젊은 날인 오늘을 소중히 보내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면 좋은 기억들을 재산 삼아 노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힘들고 그만두고 싶어도 도망치지 않고 자기 앞에 놓인 검사지의 과제를 꿋꿋이 해내려는 어르신들처럼. 시련과 역경 속에서 용기 있는 선택을 내리는 삶을 살아나가야지.